하춘화 부친 101세를 일기로 타계 “뒤늦게 밝혀진 아버지의 정체” 그녀의 안타까운 비보를 확인해 보세요

지난 TV 조선 화요일은 밤이 좋아에 출연해 화려한 탭댄스를 선보였던 하춘화. 하춘화는 부친상을 당했으나, 여러 상황을 고려해 살라 생전 자신을 가수로 만들어주신 아버지의 장례를 조용히 치렀습니다. 빈소에는 동료 연예인들의 조문이 이어졌고, 하춘화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과거 부친의 99세 생신 당시, 고향인 전남 영암에서 마을잔치도 열어 드렸던 하춘화는 백수 잔치를 해드린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백수 잔치 당시에는 380명 정도 사는 시골 마을의 흥겨운 풍악이 울려 퍼졌고, TV에서만 보던 김흥국과 현숙,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 송해 선생님 등 연예인들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하춘화의 부친은 99세의 연세에도 노래도 부르고, 말씀도 잘하셨을 정도로 불과 얼마 전까지는 정정하셨고, 작고하시기 몇 년 전부터는 딸에게, “내가 죽으면 너는 내 생각이 많이 날 거다.”라고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셨던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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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에 재능이 있던 어린시절

전남 영암에서 4자매 중 둘째로 태어나, 어릴 적 부산으로 이주에 살았던 하춘화는 학문에 소질이 있었던 다른 자매들과 달리, 본인만 특이하게 노래 재능을 타고났다고 합니다. 4살 때 이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을 금방 따라 불렀으며 300여 곡이나 듣고 자랐습니다. 그렇게 특이한 그녀를 보고, 동네 주민들이 “너만 영도 다리 밑에서 주어왔다.”라고 말하면 진짜인 줄 알고 울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어린 시절에는 부산에는 중국인들이 차린 중국 식당들이 참 많았는데, 하춘화는 동네 중국 식당에서 중국인들이 먹고 있는 찐빵이 너무 맛있어 보여서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고, 이런 춘화를 본 중국인 이웃들이 “노래를 한 곡하면 빵을 주겠다.”라고 하자, 중국집 앞에서 즉석 공연까지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 모습을 발견한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창피해서 집으로 끌고 가게 되는데, 아버지는 당시 아직 시집들을 가지 않아 같이 살고 있던 고모들에게 “얘가 왜 이러냐?”라고 따졌고, 고모들은 “오빠는 사업하느라 잘 모르겠지만, 얘가 보통 애가 아니다.”라며 “무슨 노래든 듣기만 하면 곧장 따라 부른다.”라며 사실을 알려주게 됩니다.

그 말을 듣고 놀라게 된 아버지는 딸의 재능을 키워줘야겠다 싶어, 이후 서울로 가서 동화백화점 4층에 있었던 동화예술학원의 하춘화를 입학시키게 되었습니다. 과거 연예인은 딴따라라고 하던 시절, 아버지는 오히려 딸의 재능을 밀어줄 정도로 앞서가는 분이셨는데, 학원에 도착해서 입학 테스트를 하려고 하자, 선생님들은 조그만 애가 온 걸 보고 상대를 하지 않으려고 다들 슬슬 피하고 가버렸고, 그러다 한 선생님이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하춘화에게 피아노를 쳐주자, 어린 춘화는 반주에 맞춰 기가 막힌 노래 실력을 뽐냈다고 합니다.


그러자 저쪽으로 갔던 선생님들은 도로 이쪽으로 다시 몰려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춘화에게 당시 한두 살 위였던 기타 치는 오빠와 아코디언 언니를 붙여 하춘화와 3남매라는, 지금으로 치면 아이돌 그룹을 결성해 주게 되었습니다. 기타와 아코디언, 반주에 하춘화가 노래를 부르니 백화점에 있던 사람들이 다 모여들게 되었고, 그렇게 입소문이 나면서 이들에게 어느덧 공연 요청이 쇄도하게 되더니, 결국 하춘화는 6살의 나이에 삼남매 멤버들과 함께 종로3가 천일 극장에서 함박눈이 내리는 날에도 표를 사기 위해 관객들이 길게 줄을 설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자랑하며, 이후 솔로 어린이 가수로 정식 데뷔하게 됩니다.

보통 다른 친구들이 10대가 되어서야 진로를 고민하지만, 하춘화는 태어날 때부터 노래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고, 지금까지도 노래를 선택한 것을 조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녀의 아버지

반면에 그녀의 아버지는 음치였을 정도로 노래의 소질은 없었지만, 대신 듣는 귀는 좋아서, 작곡가로부터 곡을 받았을 때 딸에게 “이 노래는 네가 부르라.”라고 했지만, 하춘화가 거절해서 노래가 다른 가수한테 갔다가 히트를 쳐서 아쉬웠던 곡들이 참으로 많았다고 합니다. 하춘화는 집에서 부모님의 딸만 4명이었다 보니, 다른 집처럼 매를 들고 때릴 일도 없어서 아주 조용히 자랐다고 합니다.

그녀가 가수로 유명해지고 나서도 외출했다가 들어오면 제일 먼저 아버지께 가서 오늘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세세히 이야기했고, 아버지는 그 이야기들을 듣는 게 유일한 낙이셨는데, 어린 딸이 밖에서 누구한테 칭찬을 들으면 덩달아 너무 기뻐하셨고, 또 누가 미워한다고 하면 “누구냐?”면서 같이 흥분하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그만큼 딸을 진심으로 아끼셨고, 평소에 자식에게 “약속 장소에는 항상 일찍 가거라.”, “인생은 인내의 연속이다. 잘 참아야 한다.”, “노력해라.”, “정직해 등 바른 사람이 되도록 교육하셨다고 합니다. 하춘화 역시 평소 아버지의 모습을 꼭 빼닮았습니다. 예를 들어, 길에 1만 원 한 장이 떨어져 있으면 보통 다른 이들은 주워서 가지지만, 자신은 돈 근처에도 가지 못할 정도이고, 그 바람에 성격적으로는 재미없는 사람이란 말도 많이 듣고 있는 정도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법관이 되고 싶어 법 공부를 많이 하셔서 법에 대해 박식하셨고, 과거 나이가 어린 가수는 가수협회 규정상 회원증도 만들어주지 않아 연예 활동도 불가능했지만,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법적 논리로 설명해 결국 협회 규정이 바뀌게끔 하셨습니다. 그 덕은 하춘화만 누렸던 게 아니라, 이후 다른 어린 가수들까지 많이 나오게 된 데에 일조하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법 공부하다가 중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폐에 병이 났기 때문이었는데, 당시는 약이 없어 고칠 수가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절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한 스님이 약초를 따다가 아버지께 계속 한약을 지어서 주셨는데, 아버지는 스님이 주시는 약이 뭔지도 몰랐지만, 꾸준히 먹었더니, 그 결과 폐병이 깨끗이 낫게 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이후에 결혼도 하고 사업도 해서 자리를 잡은 뒤, 은혜를 갚으려고 그 스님을 다시 찾아가게 되지만, 스님과는 돌아가실 때까지 다시는 만나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영암에 학교를 설립하게 된 계기

하춘화의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주변에서 천사라고 할 정도로 아버지가 참으로 선한 분이셨습니다. 6.25가 끝나고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없는 형편에 서로 돈도 꿔주고 하던 시절, 하춘화의 아버지는 이웃에게 빌려준 돈을 받으러 갔다가 오히려 쌀을 주고 오실 정도로 베푸는 분이셨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아버지는 사회 기부에도 관심이 많으셨고, 또한 고향 전남 영암에 당시 고등학교가 하나도 없어 자식을 고등학교에 보내려면 광주나 목포로 유학을 보내야만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학비도 버거운데 하숙집도 얻어줘야 하니, 영암에 고등학교가 생기는 것이 영암 사람들의 염원이었습니다. 하춘화가 17살이던 시절, 아버지는 “네가 이걸 해주면 안 되겠니?”라고 딸의 의사를 묻게 되었고, 당시 10대였던 하춘화는 그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잘 몰랐지만, 그저 부모 말씀이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러겠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먼저 부지를 확보하고 허가를 받느라, 여기저기를 분주하게 다니셨고, 그 밖의 영암 출신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도움까지 얻어가며 결국 영암의 고등학교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학교가 들어서고 개교식을 하는 날, 학교에는 무대가 설치되었고, 하춘화의 공연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멀리 산 위에 올라가서까지 볼 정도로 약 2만 명이나 운집하게 되었습니다. 개교식의 클라이막스로 당시 인기를 끌던 영화 아리랑 노래를 부르자, 그걸 본 영암의 어르신들은 춤을 추면서, 어떤 이는 감격해서 하춘화를 끌어안고 울기도 했으며, 하춘화는 그 감격스러운 장면이 아직도 인생에서 잊히지 않을 정도로 깊은 인상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 학교는 현재 국립학교가 됐다니, 당시 아무것도 몰랐던 나이였지만, 하춘화는 그저 아버지께 순종했던 그것이 귀중한 열매를 맺어 오늘날 자신의 업적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연예인 기부왕

더구나 하춘화는 지금껏 기부한 금액만 200억이 넘는다고 알려져 있으니, 번 돈을 거의 기부에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기부를 하면서 돈이 아깝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며, 내 돈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이것은 자신의 사명이자 목소리가 나오는 날까지 해야 하는 봉사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하춘화가 6살 때부터 연예 활동을 해온 온갖 자료들을 버리지 않고 다 모아왔고, 거기에는 하춘화뿐만 아니라 과거 활동했던 여러 가수의 자료들까지 다 포함되어 있으며, 이 진귀한 자료들을 돌아가시기 10년 전에 고향인 영암군에 기증했다고 합니다. 영암군은 이 많고 귀한 자료들을 정리해서 영암군에 한국 트로트 가요센터를 건립해 박물관처럼 전시해 놓았으며, 현재 트로트 아카데미도 설립이 확정되어, 대극장과 기숙사까지 갖춘 트로트 가수를 꿈꾸는 전국의 젊은이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한국 트로트의 메카로도 계획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대단한 사회공헌에 대해 그녀는 “이것들이 모두 아버지로부터 배운 삶의 방법이며, 아버지는 과거 30년 전 칠순의 나이에 컴퓨터가 보급도 많이 안 되었던 시절,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하춘화 홈페이지를 제작하기도 할 정도로 앞서가는 분이기도 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춘화는 한 번 공연이 끝나면 기자회견을 하게 되는데, 똑같은 질문에 계속 답을 해주는 일이 상당히 피곤하다 보니, 질의응답 때는 기자들에게 “하춘화 홈페이지를 참조해주세요.”라고 하면 끝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칠순의 나이에 컴퓨터를 새로 배우실 정도로 노력하는 삶을 사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항상 딸에게도 노력을 강조하셨으며, 하춘화 역시 “사람의 성대가 늙기 때문에 남자는 70세, 여자는 65세가 지나서도 변함없이 노래 실력을 유지하고, 90세까지 나이를 뛰어넘어 역주행하려면 끊임없이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끝없는 노력 끝에

그렇기에 탭댄스도 10년째 배우면서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고, 또한 38세부터 4번이나 대학원 시험에 응시한 끝에 50세에 박사학위까지 받았기도 하였습니다. 대학원 입학시험에 자꾸 떨어지니까, 포기할까?라고 생각했지만, 계속 도전한 끝에 결국 입학을 해냈다고 합니다. 박사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위치가 있는 이들이어서, 학교에 다니던 당시 낮에는 일하고 밤에 와서 수업을 듣는데, 다들 5학기 종료 후 탈진할 지경이 되자, 다른 이들은 “1년만 쉬었다가 다시 오겠다.”라며 휴학했지만, 하춘화는 지금 쉬면 영원히 못 돌아올 것 같아 끝까지 참고 견뎠고, 결국 2년 반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해냈다고 합니다. 하춘화의 4자매가 전부 박사라고 하는데, 나머지 세 자매에 이어 하춘화마저 박사를 따내자, 아버지는 딸에게 “장하다. 수고했다.”라며 격려를 해주셨다고 합니다.

그리운 아버지

또한 그녀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일주일에 3~4차례 꼭 만나서 함께 식사했고, 전국의 맛집을 전부 모시고 다녔으며, 해외 공연이 있으면 항상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갔다고 합니다. 또한 아버지의 팔순 생신 때는 부모님을 모시고 세계 일주도 했다고 하니, 이런 하춘화의 모습을 본 남편은 “당신이 독특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렇게나 부모님께 잘해드렸지만, 그래도 또 못 해 드린 게 생각나 아쉽다는 하춘화는 성격상 애교가 없어서 부모님께 평소에 한다라는 말이 쑥스러워서 거의 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문득 나중에 부모님이 안 계시면 제일 후회될 게 뭘까? 생각해 보니 “사랑한다”라는 말을 못 했다는 게 아닐까 싶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는 “사랑한다”라고 많이 말씀드렸고, 아버지도 그 말을 들으시면 “그래, 나도 사랑한다.”라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사실 그녀는 아버지가 안 계시는 삶은 생각도 못 해봤고, 자신의 평소 말투와 사용하는 단어까지 아버지를 닮았으며 생선이나 갈비같이 뼈가 있는 음식은 별로 안 좋아하는 것도 닮았고, 김치도 익은 것보다 생김치를 좋아해서 어머니는 “아버지와 춘화는 생김치랑 불고기만 있으면 된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딸에게 “내가 죽고 없으면 내 생각이 많이 날 거다.”라고 말씀을 하셨던 건데, 주변에서는 하춘화에게 “부모님께 할 만큼 했다.”라고 말하지만, 아직도 그녀는 “더 못 해 드린 것만 생각나고, 아직도 더 해드리고 싶은 게 많으며, 부모님이 있어서 내가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갚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라고도 말했습니다. 모쪼록 하늘로 떠나신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 또한 그녀의 인생에 앞으로 즐거운 일들만 펼쳐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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