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빠이 이상용의 안타까운 근황” 방송에서 볼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알아보세요.

지금은 사라진 추억의 방송 프로그램 우정의 무대를 기억하시나요? 어릴 때 자주 봤던 방송이며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어머니가 찾아와 “우리 어머니가 맞습니다.”라고 외치며 자신의 어머니를 맞추는 코너와 그 프로그램 MC 진행했던 방송인 이상용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합니다. MC 이상용은 유난히 작은 키와 약한 체력으로 성장했지만 그러한 콤플렉스를 이겨내기 위해 체력도 기르고 ROTC 장교 신분으로 군 복무까지 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군인의 마음은 군대를 다녀온 사람만이 알듯이, 당시 시청자들은 물론 군인들에게 제일 사랑받는 진행자이었습니다. 오늘은 한때 방송가를 휘어잡았던 이상용 씨가 어쩌다 방송에서 점차 안 보이게 된 것인지 그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아보겠습니다.

이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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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용의 어린시절과 결혼

이상용 씨는 어린 시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는데 미숙아로 태어나 몸이 매우 약했다고 합니다. 곧 죽을 것 같이 보여 구덩이 속에 던져진 채 생매장당할 뻔했으나, 이모가 구해서 살아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영양실조로 힘이 없고 약해서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운동을 열심히 했고 뛰어난 몸을 만들게 되었지만 키는 크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이상용의 친구 언니에 친구인 윤혜영은 이상용을 귀여워해 주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오누이처럼 붙어 다니며 항상 함께하였습니다. 오누이처럼 붙어 다니다가 이상용의 마음에 불씨가 생겼고 윤혜영을 짝사랑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후 이상용은 밤새도록 윤혜영을 설득했고 마침내 연인으로 발전하였지만, 결혼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혼하겠다고 윤해영의 집에 이야기하자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상용의 집안도 변변치 않고, 돈을 잘 버는 것도 아닌 키 작은 사위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내 윤혜영은 결혼을 선택했고 결국 이상용과 윤혜영은 1966년 2월 25일 대학을 졸업하고 3월 결혼식을 올렸다고 합니다.

아내 윤혜영은 한 살 연상이며 키가 170cm이며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TBC 3기 탤런트 출신이기도 하며 신문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상용은 1969년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닥치는 대로 일을 시작해 낮 밤 쉬지 않고 일하였다고 합니다.

이상용과 윤해영은 서울로 올라와 닥치는 대로 일하다가 답답한 마음에 점쟁이를 찾아갔다가 연예인을 해봐라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방송국에 일하는 선배들을 찾아갔습니다. MBC 유쾌한 청백전을 담당하는 PD 선배였는데 끈질기게 졸라서 출연 기회를 주어진 것입니다. 당시 근육을 자랑하며 장기자랑을 하였고 `뽀빠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정의 무대

이렇게 이상용은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해 이후 우정의 무대 MC를 맡게 되었으며 엄청난 인기를 얻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용이 우정의 무대를 진행하면서 많은 해프닝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이상용에게 군대 간 아들을 둔 아버지들이 계속 편지와 전화로 “왜 아버지 만나는 건 안 하느냐? 아버지들 섭섭하게….” 하면서 지속해서 문의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상용은 “어머니 대신 아버지를 부르는 특집을 방송한 적이 있었죠. 아버지 특집으로 진행한 우정의 무대에서 이상용이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객석의 병사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보고 쭈뻣쭈뻣하는 상황이 벌어졌어요.”라고 전하였고 이상용도 당황해서 “어! 이게 아닌데….”하고 허둥대는 모습이 그대로 카메라에 잡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출연한 해당 아버지는 감동적으로 나오는 어머니들과는 딴판으로 뒷짐을 지고 팔자걸음을 하면서 어마어마하며 무게를 잡고 나오기도 하였으며 방송 분위기를 파악 못하고 좌중을 썰렁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 해당 아버지는 “야! 너 자꾸 집에 전화 좀 하지 마. 너무 자주 걸어서 지겨워”라고 말했고 그 아들은 아버지를 전혀 반가워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같이 나란히 서요.”라는 이상용의 안내에도 슬금슬금 떨어지려 있는 등 이상용 방송 인생에 제대로 된 흑역사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후 아버지 특집은 영구 봉인 되었습니다.

이상용은 그 당시 해프닝을 이야기하면서 자식들이 어머니한테 느끼는 감정과 아버지한테 느끼는 감정이 다르며 아버지는 겉으로는 체면을 챙기려고 있는 자세는 다 잡고 나오는 경향이 있는 데다가 한국 가정에서 자식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다소 부담스러운 존재라는 인식이 있어 그렇게 된 것 같다고 밝혔습니다.

안타까운 누명

이상용은 스스로 자신을 독한 사람이라고 칭하며 “평생 술과 커피를 한 번도 입에 대본 적이 없다.”라고 밝혔습니다. 방송 출연 외에도 1973년 한국 어린이보호회을 세워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업을 하고, 가슴속의 작은 소망 등 심장병 어린이 수기를 6권이나 낸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거 심장병 수술비를 횡령했다는 의혹으로 힘들었던 시간을 떠올렸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인이 사고를 친 것이 아닌데 피해를 본 거라고 합니다.

이상용의 주장에 따르면 우정의 무대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이상용에게 김영삼 당시 국회의원으로부터 정계에 진출하라고 권유했지만, 이상용은 정치보다는 지금의 생활을 하고 싶다는 취지에서 정중히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심장병 어린이 수술 기금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쓴 것입니다.

그는 억울한 누명으로 인하여 우정의 무대를 비롯해 한국 어린이보호회 회장직 등 자신이 하고 있던 모든 일을 전부 그만둬야 했고, 결국 경찰에 소환돼 조사받았습니다. 당시 그는 3개월 만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해당 사실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고 스트레스로 일시적인 실명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전하였습니다.

이상용은 “600명을 47년간 고쳤는데 100억 원을 썼다. 근데 한 명도 안 고쳤다고 신문에 나면 나는 어떻게…. 평생 심장병을 고친 사람인데….”라며 “그걸 신문에 안 내줬다. 미치고 싶었다. 심장병 수술한 애들이 600명이나 되는데 신문에 안 내줬다. 혼자 많이 울었다. 너무 힘들었다.”라며 당시 심경을 밝혔습니다. 또 이상용은 “지금도 눈물이 나려고 하는 게 우리 아버지가 고생하셨다. 언론인인데 우리 아들, 그런 아들 아니라고 인쇄해서 대전역 광장에서 뿌리다가 돌아가셨다.”라며 울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故 송해 님과 이상용의 우정

그런데 얼마 전 세상을 떠난 故 송해 님과 이상용의 우정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전국노래자랑에 MC 하면 송해 선생님이 단연 떠오르지만, 이상용도 1980년대 중반 이 프로그램의 MC를 본 경력이 있습니다. 무려 2대 MC이었습니다. 아울러 송해 님이 자신의 후임 MC 후보 중 한 명으로 평소 친분이 깊던 이상용을 꼽기도 하였습니다.

실제로 송해 님이 이상용에게 “너나 나나 키가 비슷해서 위화감이 없을 테니 네가 전국 노래자랑 MC 하면 되겠다.”라고 말했으나 이상용이 스스로 전국 노래자랑 후임 MC의 꿈을 접었다고 합니다. 이유인즉슨 “송해 선생님보다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날 수도 있어서….”라고 답했습니다.

당시 이상용도 건강 체질이었지만 이상용을 뛰어넘을 정도로 송해 님이 고령에도 건강을 잘 유지했기 때문에 나온 농담이었습니다. 그러나 2022년 6월 송해 님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 농담도 옛말이 됐었습니다. 송해 님은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송해 님의 딸이 신고했으며 구급차로 병원에 이송했지만,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이상용은 故 송해 님을 추모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님은 제게 살아있는 국보나 마찬가지였어요. 오늘 그 국보를 도난당하는 기분입니다. 왜 이렇게 갑자기 급하게 가셨나요. 1973년 코미디 연기분과 위원회에서 형님을 처음 만났지요. 당신보다 작은 코미디언은 처음 본다며 저를 참 예뻐하셨어요. 제일 만만한 게 저였지요. 형님과 콤비로 대활약하던 박시명 씨가 돌아가시자 동생처럼 저를 데리고 다녀오셨잖아요. 쇼 프로 MC로 사방에 추천도 해주셨고요. 그때 하신 말씀 기억합니다. 상용아, 우리 둘이는 절대 크지 말고 이대로 잊자. 크면 가치가 떨어진다. 우리가 키 큰 사람 이기는 방법은 공부밖에 없다.라고 하셨지요.

형님이 신문을 꼼꼼히 읽는 것을 본 다음부터 저는 책과 신문을 보기 시작했어요. 뽀빠이의 살길은 형님이 만들어주신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형님은 국가대표 명 MC였습니다. 그 순발력과 위트, 매끄러운 진행 솜씨, 어린이에게는 살가운 할아버지, 아주머니에게는 젊은 오빠였지요. 많이 배우고 흉내도 내봤지만, 저나 이상벽이 죽을 때까지 형님을 못 따라갈 거예요. 1986년에 오토바이 사고로 외아들을 잃었을 때 본 형님 표정이 생생합니다. 기억에 사무쳐서 아들이 죽은 한남대교로는 절대 안 다니셨지요. 이제 귀한 아들을 만나실 테니 그건 다행인가요. 평생 핸드폰도 없이, 신용카드도 없이 살다 간 형님을 저는 존경합니다.

1997년 뽀빠이가 심장병 어린이를 도울 후원금을 횡령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우정의 무대는 폐지됐지요. 무혐의로 결론 났지만, 저를 불러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그때 형님이 저를 위로해 주셨어요. 네가 작은놈 같았으면 건드리지 않았다. 건드리는 거 보니까 네가 많이 컸구나. 기죽지 마라. 덕분에 제가 더 딴딴해졌습니다. 장례를 희극인장으로 치른다는데 코미디계에서 형님은 국장감입니다. 만인에게 웃음을 주셨는데 정작 본인은 말년이 쓸쓸했지요. 가시는 길 외롭지 않게 이 뽀빠이가 배웅하겠습니다.”

70년대에는 어린이들의 친구, 90년대에는 군인들의 큰 형님 역할을 하며 전성기를 보낸 이상용은 1999년 MBC 아름다운 인생 이후부터 노인의 친구라고 할 만큼 노인 대상 행사, 방송에 많이 나간다고 합니다. 본인이 이제 노년이 되기도 했고 노인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건강한 모습으로 방송에서 자주 볼 수 있기를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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