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일 사별 후 엄앵란 현재 근황과 신성일 남긴 재산” 마지막 남긴 말은 꼭 확인해 보세요.

살아 생전 신성일 씨는 끊임없이 엄앵란 씨를 힘들게 만들었는데요. 과연 신성일 씨는 돌아가시면서 엄앵란 씨에게 어떤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을까요. 엄앵란 씨는 신성일 씨를 진심으로 용서했을까요. 최근 엄앵란 씨의 근황까지 전해드립니다.

엄앵란
👉“장윤정 시부모에게 용돈 얼마나 주길래?” 깜짝 놀랄 정도의 클라스에 난리 난 상황

어린시절

엄앵란 씨는 일제강점기였던 1936년에 태어나 현재 우리나라 나이로 여든일곱 살이며 서울이 고향입니다. 아버지가 섹소폰 연주자 어머니는 배우였던 예술가 집안이었죠. 부잣집 딸로 아주 유복하게 잘 자랐을 것 같은데 의외로 어려운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중학생 시절 한국 전쟁이 발발해서 대구로 피난을 떠났는데 시장에서 떡 장사를 하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해요.

그 후 서울 여상 졸업을 앞두고 대학에 진학하고자 했지만 여유가 없었던 형편 때문에 어머니는 대학 진학을 반대했고 차라리 딸이 대학에 낙방하기를 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바람과는 다르게 숙명여대에 합격해서 대학생이 되었죠. 1955년 당시 대학 등록금이 6천 원이었는데 외삼촌의 지인에게 사정사정해서 금반지를 얻어 그걸 팔아 어렵게 대학에 입학한 곳입니다.

연예계 데뷔

다음 학기 등록금이 걱정이던 엄앵란 씨는 마침 사무보조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던 영화사 사무실에 방문하게 됩니다. 엄앵란씨를 본 영화 감독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 영화 배우 안 해볼래” 이렇게 카메라 테스트 제의를 받고 마침내 1965년 영화 “단종애사”로 데뷔하게 되었죠. 엄앵란 씨의 본명은 엄인기인데요. 본명처럼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게 됩니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로 청춘 영화의 아이콘이 되었죠. 최초의 학사 출신 배우로 풋풋하고 청순 발랄한 이미지를 내세 신성일 씨와 콤비를 이루워 많은 청춘 영화에 출연합니다. 엄앵란 씨의 젊은 시절 영화를 보면 날씬한 몸매에 다나한 외모가 눈에 띄죠. 활동 당시는 하루에도 영화를 몇 편씩 겹치기로 찍던 시절이라 수백 편의 영화의 주연을 맡을 정도로 인기 있는 배우였습니다.

결혼

그러나 1964년 신성일 씨와의 결혼 후 영화 배우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전업 주부가 되어 내조에 전념하죠.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미남 배우를 독차지하게 된 대가는 혹독해서 그녀의 인생 전반을 고달프고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영화는 1960년 작 로맨스 빠빠입니다. 당시 엄앵란 씨는 이미 청춘 스타였고 신성일 씨는 데뷔작으로서 탑 여배우와 신인으로 비교가 안 되는 위치에 있었어요. 그러나 신성일 씨는 곧 당대 최고의 인기 절정을 부가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무려 오십여 편에 달하는 영화에 함께 출연했는데 1964년 영화를 찍으며 연인이 되었고 바로 그 해 갑자기 결혼합니다.

훗날 신성일씨가 폭탄 고백을 했는데 두 사람이 함께 1964년 동백 아가씨를 찍으며 관계를 가졌는데 혼전 임신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재일교포 여배우와 결혼을 시킬 생각이었던 시어머니였는데 엄앵란 씨가 임신 3개월이라는 말을 듣고 결혼을 승낙한 것이었어요. 두 사람은 1964년 11월 뜨거운 화제 속에 서울 광장동 워커힐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 결혼식은 당대 최고 톱스타 둘의 결혼이라 어마어마한 화제가 되어 이 결혼식을 구경하기 위한 인파가 운집했는데 전국에서 하객과 시민이 무려 4천여 명이 넘게 몰려들어 인산 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심지어 이를 노리고 지방에서 전문 소매치기당까지 같이 상경했다가 잡힌 게 뉴스가 된 적이 있습니다. 초청장이 엄청난 가격에 암거래 되는가 하면 결혼식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호텔 측에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별거

이 결혼식은 지금까지도 세기의 결혼식으로 회자되고 있죠. 이렇게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지만 신성일 씨는 결혼 기간 내내 두 사람을 연인으로 만들어준 영화 제목 배신처럼 배신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온전히 신성일 씨만의 잘못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사실 서로 너무 안 맞았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사소한 생활습관부터 시작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거의 맞지 않았다고 딸 강수아 씨가 증언하기도 했죠. 결국 두 사람은 1975년부터 별거를 시작해서 40여 년 이상을 따로 떨어져 삽니다.

법적인 부부가 되어 신성일 씨가 돌아가실 때까지 55년을 함께 했는데 10여 년을 빼놓고는 거의 별거를 하게 된 거죠. 신성일 씨는 남편으로서 경제적인 면에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신성일 씨는 결혼 후 1970년대에도 영화 배우로 잘 벌었지만 그 후 엄앵란 씨의 말을 안 듣고 영화 제작 사업 등을 하면서 재산을 탕진합니다. 정치에까지 욕심을 내어 세 번째 도전에 국회의원이 되기는 하지만 국회의원 두 번의 낙선으로 집에 남아 있는 가구에 빨간 딱지가 붙는 등 가게가 궁궁해져 엄앵란 씨는 혼자 대구에 내려가 무려 18년을 비빔밥집 장사를 하며 자식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신성일의 바람

그러다 엄앵란 씨는 90년대부터 아침마당에서 부부 문제 상담 코너 패널로 활동을 시작 솔직하고 거리낌 없는 입담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남편의 바람에 쿨한 모습을 보이며 사람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었죠. 그러자 철없던 남편 신성일 씨는 정말 자기가 바람 핀 것이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못 할 짓을 하고 맙니다. 2011년 신성일 씨는 자서전을 발간하면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불륜을 고백한 것입니다.

엄앵란 씨는 신성일 씨가 바람을 피워도 속으로는 끝까지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성일 씨가 만천하에 대놓고 자신의 꿈을 짓밟아버린 것이었어요. 신성일씨는 2011년 발간한 자서전에서 아내 엄앵란씨도 모르는 사실이라며 동화방송의 아나운서였던 고 김영애씨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가 낙태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혔습니다. 더구나 자서전 출판 기념회에서는 내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김명이다라고 발언해 버렸던 것이니라 아무리 똥파리들이 득실거려도 자기가 신성일씨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꿈을 짓밟아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면서 신성일씨는 아내도 사랑했고 김영애도 사랑했다. 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지금도 애인이 있다. “마누라에 대한 사랑은 또 다른 이야기다” 라고 뻔뻔하게 자신만의 사랑관에 대해 밝혔습니다. 이후 불거진 논란에 엄앵란씨는 한동안 집 밖에 나가지 못한 채 생활해야 했습니다. 엄앵란씨의 자존심은 뭉개질 대로 뭉개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엄앵란씨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네요.

암 투병

그러나 저러나 신성일씨는 왜 이렇게 바람을 많이 피웠을까요. 사실은 그도 본처 소생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전처 소생의 자녀들이 이미 여러 명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두 번째 부인이었어요.그 당시는 남자들이 두 집 세 집 살림하는 것이 묵인될 정도로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보고 자란 터라 외도에 대한 죄책감이 거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더구나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신성일 씨를 흠모하고 따랐겠습니까 사람들은 엄앵란씨가 왜 이혼을 하지 않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엄앵란 씨는 수백 편의 영화를 찍으며 수많은 인생을 간접 체험했고 인생에 있어 남편의 불륜이라는 것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요. 그러나 마음속으로 바람 핀 남편을 사형 선고했다고 말한 적도 있죠. 무엇보다 쉽게 이혼해서 딴따라라는 말을 듣기 싫었고 가정을 지키고 싶었다고 자존심으로 버텼다는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의 고통이 병이 되었는지 엄앵란 씨는 2015년 한 건강 프로그램 방송에서 유방암을 발견하게 되어 수술하게 됩니다. 그러자 신성일씨는 엄앵란씨를 극진히 간호하며 화제를 모았죠.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대신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신성일의 마지막 유언 그리고 재산…

그러다 이번에는 신성일 씨가 암 선고를 받게 됩니다. 2017년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것이죠. 생존율은 40퍼센트 정도라고 했습니다. 엄앵란씨는 신성일씨가 폐암 선고를 받던 날 그리고 퇴원하던 날까지 말 없이 병원비를 부담합니다. 신성일씨는 겉만 화려했지 재산이 한 푼도 없는 상태였어요. 남편이 초라하게 죽는 모습을 볼 수 없다며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하며 부부라기보다 동지라는 표현을 쓰며 끝까지 남편이 탑스타로서 멋있게 죽어야 한다며 남편에 대한 동지애를 드러냈습니다. 신성일 씨는 투병 중인 2018년 10월 4일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도 모습을 드러내며 아직 건재하다는 믿음을 주었습니다.

그러다 단 한 달 뒤 2018년 11월 4일 갑자기 별세합니다. 폐암 투병을 시작한 지 불과 일 년여 만이었어요. 대구 출신이었던 고인은 마지막은 지인의 소개로 요양차 가게 된 전라남도 화순에서 별세합니다. 그리고 조상의 무덤이 있는 선영 경북 영천에 안장되죠. 기자들이 엄앵란 씨에게 물었습니다. 신성일 씨가 남긴 마지막 말이 무엇이었는지 엄앵란 씨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고맙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참 수고하고 고맙다” 이런 남편을 보내고 엄앵란 씨는 두문불출합니다. 자신의 슬픈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엄앵란씨는 강하게 보였지만 사실 천생 여자였습니다. 평생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던 너무나 가슴이 아파요 신성일 씨는 하늘나라에서도 자신이 생전에 저질렀던 숱한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며 엄앵란 씨의 건강과 행복을 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신성일 씨가 살아 생전 막내딸 강수화 씨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머니와 함께 묻히고 싶다고 했는데 어머니는 생각이 완전 다르다 “남겨져 있는 게 싫다고 나 죽으면 한강에 뿌려” 하신다 하지만 지금은 엄앵란 씨도 신성일 씨 옆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오랜만에 같이 옆에 누울 생각만 해도 마음이 훈훈해진다고 신성일 씨가 돌아가신 후에도 엄앵란 씨는 그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엄앵란 근황

최근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엄앵란 씨의 근황이 알려져 화제입니다. 얼마 전 방송된 퍼펙트 라이프에 현미 씨가 출연해 육십년지기 친구라며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모습이 나왔죠. 현미 씨는 엄앵란처럼 훌륭한 여인이 없다. 존경한다며 남다른 우정을 과시했는데요. 엄앵란에게 내 심장도 줄 수 있다라고 각별한 마음을 보여줬습니다.

방송에서 보여준 친구와의 저녁 식사에서 오랜만에 특유의 호탕하고 밝게 웃는 모습을 보아 잘 지내고 계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친근하고 푸근한 입담 삶의 연륜에서 나오는 재치 있게 훈수를 두는 모습 등이 참 그립습니다.

관련 영상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You may also like...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You cannot copy content of this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