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엄마 김용림의 안타까운 상황” 어떤 상황인지 확인해 보세요.

올해 나이 83세이며 60년간 연기자로서 외길을 걷고 있는 배우 김용림은 단 한 순간도 드라마를 떠난 적이 없는 국민 엄마이자 국민 시어머니로 그녀의 연기 생활, 그 자체가 한국 TV 드라마의 역사가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배우로서 김용림은 그렇게도 긴 시간 동안 늘 자신을 찾아주는 감독과 작가가 있어서 작품이 끊어진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배우로서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했지만, 반면 인간 김용림의 삶은 그렇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부잣집 딸로 태어났지만, 7명의 첩을 둔 아버지로 인해 지금도 어머니란 단어만 떠올려도 콧등이 시큰하고, 한때에는 자신을 탐탁지 못 해하는 시어머니가 함께 생을 마감하자고 권유하며 아들 남성진을 한 번도 안아주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오늘은 배우 김용림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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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림의 과거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용림은 어린 시절 한의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집안이 상당히 부유하였고 별다른 고생을 모르고 자랐으며 또한 그녀의 어머니는 오로지 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여자로 여름에도 버선을 신고 항상 한복을 입고 있는 천상 현모양처였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남자가 돈이 좀 있다고 하면 작은 여자를 데리고 살게 되는데, 그녀의 아버지 또한 한량으로 결혼한 뒤 고작 2년 만에 첩을 무려 일곱 명이나 두게 됩니다. 그리고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당시 그녀의 아버지가 그나마 배다른 자식은 낳지 않기 위해 기생 출신인 기생첩만 두었으며 사랑채에서 첩과 같이 살았다고 합니다.

어린 김용림의 기억으로는 밤에는 그 사랑채에서 그림자가 비쳤고, 막 웃으면서 밥 먹는 소리도 들리다가 아버지가 못 갈아입을 때만 잠깐 안채에 들어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랑채에서 첩과 함께 사는 모습을 보고 살았으며 그때마다 어머니는 늘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당시 가제 수건에 잣기름으로 마냥 장만 닦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3층 화류장을 버리지 않고 김용림 그녀가 갖게 되는데 오빠들은 귀신 나올 것 같다고 말리지만, 그녀가 그것을 닦으면서 “우리 엄마는 어떻게 그런 슬픈 인생을 사셨을까.”라며 어머니 생각에 버릴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한편 여고 시절 연극반이었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연기 쪽에 관심이 생겼고 졸업 후에는 당시 TV가 없던 시절이라 성우가 곧 연기자라서 KBS 성우 공채 4기로 입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 당시에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오빠들이 집안의 어른이었는데, “우리 가문에 감히 딴따라를 하겠다”라며 돌연변이가 나왔다며 극구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김용림이 하도 고집을 부리니 할 수 없이 허락하게 됩니다.

김용림의 남편

그렇게 입사한 KBS 성우 시절 유난히 눈에 띄는 선배가 한 명 있었는데 바로 지금의 남편 남일우입니다. 당시 남편은 패셔너블하고 예쁘장하지만, 늘 과묵한 사람으로 등나무 밑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호감으로 다가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와도 말을 안 하길래 그러려니 하며 아쉬워하던 찰나, 어느 날부터 김용림의 양산이나 뜨개질 가방 같은 소지품이 종종 없어졌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그녀의 남편 남일우가 감춰 놓고 장난을 친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친해진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남산 KBS에서부터 그녀가 살던 돈암동 집까지 데려다주었고, 그녀가 다리에 마비가 와서 거의 1년을 침을 맞으러 다녔는데 그때도 남편 남일우가 늘 함께 가줬다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뜬금없이 “어제 달을 봤냐? 달을 보면서 생각했는데 용림이와 같은 공간에서 달을 보고 싶다.”라며 남일우가 그녀에게 프러포즈하였습니다. 당시 남일우는 가난하고 안정되지 못한 직업인데다 심지어 외아들이라는 이유로 그녀의 어머니가 반대했지만, 그래도 둘이 벌어서 잘 살겠다고 맹세를 한 후 마침내 허락받아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시집살이

그러나 당시 부잣집 막내딸이자 TV 스타였던 김용림이 행여나 아들을 무시할까 봐, 그녀의 시어머니는 며느리로서 김용림을 그다지 탐탁지 않아 했습니다. 부엌에는 절대 못 들어오게 했지만, 그 이상의 엄청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후 첫째 딸을 낳고 도저히 참기 힘들었던 김용림은 딸 양육권까지 고민할 정도로 이혼 생각이 확고하였고 결국 먼저 이혼하자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남편 남일우가 1주일만 여유를 달라고 했으며 그 일주일이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시어머니가 그녀를 심하게 대하는 날이면, 남편 남일우가 그녀를 붙잡고 데리고 나가 담벼락을 가리키면서 “이게 우리 엄마다, 그러니까 여기다가 욕을 해라.”라고 했습니다. 사실 아들이 엄마 욕을 하라고 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 말을 들은 김용림은 정말 감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담벼락에 대고 30분 동안 시어머니 욕을 잔뜩 하니까 속이 후련해졌고, 그렇게 30분이 지나니 그동안 담배만 피던 남편이 “이제 그만해”라고 딱 한 마디 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시어머니와 그녀 사이에서 남편 남일우가 분명하게 행동하며 공평하게 판단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시어머니는 갑자기 변한 아들의 행동에 놀라 자빠지고 말았으며, 또한 “착한 아들이 김용림을 만나서 저렇게 됐다.”라며 결국 아들을 며느리에게 빼앗겼다라는 배신감에 어느 날 갑자기 김용림에게 “너랑 나랑 둘 다 생을 끊고 하늘로 가자.”라고 이상행동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아들 남성진의 이상행동

그 무렵 성우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TV가 개국하게 됩니다. 남편과 그녀는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드라마에 출연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때 아들 남성진은 항상 일로 바쁜 부모님의 부재로 어렸을 때 학교와 문방구 아줌마가 엄마였으면 좋겠다라는 생각할 정도로 어린 시절 부모님의 애정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시대에는 엄마가 일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지요. 또한 아들 남성진의 소풍이나 운동회 등의 행사를 단 한 번도 따라간 적이 없었고 매번 우는 아이를 떼어놓고 방송국에 가야만 했습니다.

훗날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동치미라는 프로그램에서 처음으로 아들의 손을 만져봤다고 고백했으며 “사실 아들이 너무 좋았지만, 당시 유독 엄격하고 완고했던 시어머니와 같이 살다 보니 그 앞에서 자녀들을 마음껏 안아줄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촬영이 일찍 끝나기라도 하는 날엔 아들이 너무 보고 싶었지만, 행여나 시어머니와 부딪히기 싫어서 집에 안 가고 남편과 영화를 봤으며 결국 덩달아 엄마의 따뜻한 스킨십을 받지 못한 남성진은 중학교 때까지 손을 빨고 귀를 만지는 버릇이 생기고 말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김용림의 현재

마지막으로 김용림 그녀에게 “좋은 어머니는 어떤 어머니인가요?”라는 질문에 그녀가 대답하길 “어머니에는 정답이 없다. 듣는 것만으로도 콧등이 시큰한 이름으로 엄마라는 단어는 그것만으로도 좋다. 지금 내가 여든이 넘었는데 석양만 보면 엄마 생각이 난다. 내가 43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그때 당시 연극을 할 때로 펑펑 울다가도 무대에 올라가서는 웃어야 했다. 그리고 방송국에서 엄마 관련 토크 프로그램을 하자는 제안을 몇 번 받았는데 눈물이 나서 못 할 것 같아서 그때마다 안 한다고 했다.

그런데 반면 남편은 58년을 함께 살아보니 남는 건 애정뿐이더라. 22살에 남편의 과묵함과 빠른 걸음걸이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는데 지금은 모든 게 정반대가 됐다. 입만 열었다 하면 잔소리에 남자가 어찌 그리도 좁쌀 같은지, 거기다가 몸은 어쩌면 그리도 굼뜨고 추해졌는지, 옛날에는 키가 큰 그 남자를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늙으면서 키도 줄어들었는지 이제는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저절로 무시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밖에서는 남일우 씨가 너무 유쾌하고 재미있다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남편이 집안에서 웃는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희미하게 웃는 표정을 몇 번 봤을 뿐이다. 더군다나 내가 차려주는 식사나 몸에 좋다는 음식을 모두 외면하는데, 가진 정성을 다해 코앞에 대령하지만 먹기 싫다면 치우라고 한다. 독자로 자라서 먹어라, 먹으라 하는 어머니의 강요에 트라우마가 있는 건 알지만, 내 성의를 무시할 때 너무 속상하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이혼하지 않고 가정을 지킬 수 있었던 건 사실 모두 남일우 씨 덕분이다. 그렇게 시댁에서 못되게 굴어도 남편 덕분에 잘 참고 살았다.

그리고 내가 올해 83살인데 나라고 세월이 또 가는 게 왜 두렵지 않겠냐. 나이가 들면 조금만 몸이 불편해져도 더 겁이 난다. 불편과 통증에 대한 내성이 완전히 사라져 땀이 조금만 나도 괴로워진다. 더군다나 쉽게 목이 잠기고 감기에 허리디스크까지….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한창 시절에도 몸은 늘 피곤했고 사는 일에 불안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더 내몰고 나무라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스케줄이 없으면 운동하든, 어떻게든 대문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건 불쌍한 인생이지만 반대로 너무 믿어도 불행해지게 된다. 자신에 대한 약간의 의구심이 갖고 있는 게 여러모로 좋다. 나는 불교가 모태 신앙인데, 석가모니의 말씀과 경전으로 마음을 수양하는 편이다. 난 인과응보를 믿는다. 내가 지은 업은 내가 꼭 받고 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단 한 마디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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