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중 배우 선우용녀 긴급 응급실로 실려 간 상황” 어떤 상황이었는지 확인해 보세요.

선우용녀가 과거 방송 중 갑자기 말이 어눌해지고 발음이 되지 않는 일을 겪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방송에 출연한 선우용녀는 뇌경색이 왔다며 방송 녹화 중에 이 사실을 알았고 그 자리에서 의사에게서 뇌경색 진단을 받았다고 전했습니다.

당시 녹화 중 발음이 갑자기 어눌해지다가 말까지 못 하는 증상이 발생해 결국 녹화는 중단되었고 선우용녀는 응급실로 갔습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알아보도록 할게요.

선우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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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어린시절

선우용녀는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광복이 되던 날,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어릴 적 아버지가 신문 기자였고 집안 형편도 넉넉해 학창 시절에 당시로서는 드물게 발레를 배웠다고 합니다. 중, 고등학교 때 자신의 실력이 최고인 줄 알았던 선우용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대한극장에서 외국 무용수들이 와서 하는 백조의 호수 공연을 보고 나서 충격을 받고는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자신은 발끝을 세우려고 말도 못 하게 고생했는데 외국 무용수들은 식은 죽 먹기처럼 잘했고, 그들의 다리를 보고 자기 다리는 무처럼 보여서 고3 때 무용을 포기하고 외교관으로 진로를 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학에 떨어지면서 그녀는 연기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연기자 데뷔

선우용녀가 연기자의 길로 접어든 데는 큰 언니의 영향이 컸습니다. 6남매 중 장녀인 언니는 당시 중학교 교사였는데 부모처럼 엄격하게 동생들을 보살폈습니다. 당시 학교에서도 누구 선생님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무서운 선생님이었으니 동생들한테 엄하게 대한 건 당연하였습니다. 말하는 태도 몸가짐도 다 언니가 가르쳤고 동생들이 몰래 라디오를 듣거나 이상한 책을 읽고 있으면 대번에 알아차리고는 야단을 쳤는데 선우용녀는 오죽하면 저건 귀신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한창 사춘기 때는 원망을 하기도 했지만 셋째인 그녀를 비롯한 동생들은 지금은 언니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크다고 합니다. 맏딸이 살림 밑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모님이 맏이한테 힘을 실어주니까 자연스럽게 형제간에 기강이 생기고 언니가 공부도 가르쳐주고 진로 상담도 해주면서 동생들이 다 잘 돼서 우애도 좋아지게 됩니다.

그런 선우용녀는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해 배우를 하면 좋겠다.”라는 언니의 권유로 서라벌예대에 입학한 후, 1학년 때인 1965년에 탤런트로 데뷔하자마자 곧바로 드라마 상궁나인에 주연으로 발탁돼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됩니다. 당시 그녀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60년대 중반 국산 자동차가 나오기 전, 현대에서 포드와 기술 제휴를 맺고 생산한 자동차가 있었는데, 선우용녀는 그 모델로 발탁되면서 자동차를 한 데 선물 받게 됩니다.

그녀가 금방 운전을 배워 차를 몰고 나가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여자가 운전하는 경우가 드물었던 시절이라 사람들은 신기하게 선우용녀를 쳐다보고 난리가 난 바람에 사고가 난 적도 있었고 그럼 또 내려서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사고가 났으니 한 번만 봐주세요.”라며 대신 용서를 빌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결혼

이런 선우용녀는 데뷔 2년 만인 1967년 당시 사업을 하고 있던 남편과 결혼하게 됩니다. 남편은 유명한 사업가인 김세명으로 아남그룹의 친인척이었습니다. 선우용녀는 남편과는 11살 차이가 났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반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혼식 당일부터 그녀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부딪히게 됩니다. 당시 예식 장소가 반도호텔이었는데 시간이 되어도 신랑은 나타나지 않았고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던 선우용녀는 기다림 끝에 시간이 얼마 지나고 신랑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다른 사람 빚을 대신 떠안고 채권자들한테 몰려 때맞춰 식에 나타날 수 없는 처지였다고 털어놓습니다. 당시 빚쟁이들은 선우용녀에게 남편을 보고 싶으면 도장을 찍으라고 협박했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녀는 도장을 찍게 되어 대신해서 빚을 다 갚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결혼식을 겨우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 도장 때문에 그때부터 그녀의 인생은 본격적인 빚과의 전쟁이 시작되게 됩니다.

빚과의 전쟁

채권자들은 집이든 촬영장이 된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쑥불쑥 나타나 그녀를 괴롭히게 됩니다. 빚이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하게 큰돈인 2천만 원 정도였는데 집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고 출연료 압류가 들어오니 선우용녀는 참 많이도 서러웠다고 합니다. 본인은 축의금 낼 돈이 없어 결혼식에 못 간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결혼하고 나서는 연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속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결혼 전에는 작품 선정에도 까다롭기로 유명했고 영화에 포옹 장면이 있어서 싫다고 하며 무조건 고사하던 그녀이었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빚에 시달리시면서부터 그저 일이 계속 들어오는 게 고마울 뿐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산후조리마저도 그녀에게는 사치였습니다. 잠을 못 잘 만큼 여러 작품에 출연하는 바람에 촬영장에서도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고 자기 대사도 외우기 바빠서 상대방 대사는 볼 시간도 없었다고 합니다.

결혼 3년 만에 딸, 아들을 연년생으로 낳고도 계속 일하느라 산후조리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큰딸을 낳고 나서는 바로 아씨라는 드라마에 출연했는데 아이를 낳고 사흘 만에 강릉 경포대에 빠지는 장면을 촬영하기도 했으며 아들을 가졌을 때는 영양실조로 쓰러지기도 했었습니다. 한복을 입어서 화면상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았을 뿐, 임신과 출산을 하면서도 드라마 촬영을 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선우용녀의 남편은 8남매 중 장남이었기 때문에 시집 식구를 보살피는 것 역시 그녀의 몫이었습니다. 넉넉한 친정에 기댈 수도 있었지만 소심하고 자존심 강한 그녀는 그건 꿈도 꾸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댁은 시동생 둘만 결혼하였고 다른 동생들은 그녀 부부가 보살펴야 하는 처지였는데 맏며느리이니 어쩔 수 없었지만, 부모님이 억지로 떠밀어 결혼한 게 아니니, 수중에 10원 한 장 없어도 친정에 힘들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일해 결혼생활 10여 년 만에 결국 빚을 청산한 그녀는 83년 연기를 그만두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됩니다.

이민 생활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큰딸은 어느 날 집에 돌아오더니 “엄마, 다른 집 엄마들은 왜 집에 있어?”라고 묻는 말에 정신이 번쩍 났다고 합니다. 그동안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키워주셨는데 자신이 아이들한테 너무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녀는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곁에 있어 줘야 한다는 생각에 이민을 준비하게 됐다고 합니다.

자신이 한국에 계속 있으면 일을 거절하지 못할 것 같아 결국 이민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편안할 줄 알았던 타국에서의 이민 생활은 역경의 연속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식당을 하다가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는데, 파출부를 하면 한 달에 200만 원 정도 벌 수 있다고 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비전이 없어 보였고 미용 기술을 배워 미용실에 취직도 하게 됩니다. 사실 선우용녀는 결혼 초에 남편한테 2년 동안만 돈을 받아봤지, 이후로는 평생 스스로 벌어 먹고살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미국에 뿌리내리기 위해 이민 생활을 6년 동안 단 한 번도 한국을 찾지 않았지만, 1989년 드라마 역사는 흐른다. 제작팀에게서 출연 제의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녀는 제작 단계부터 자신이 캐스팅 1순위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컴백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렇게 부부는 아이들을 미국에 남겨둔 채 1989년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와 남편의 사고

이 과정에서 선우용녀는 딱 한 번 친정어머니에게 힘들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어머니는 따끔한 충고로 딸을 보듬었다고 합니다. 친정어머니는 딸이 일하는 걸 누구보다 안타까워하셨지만 선우용녀가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다고 해서 남편이나 시집 식구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그러면 그동안 고생한 것마저 빛을 못 보고 도로 아미타불이 된다고 일러주셨습니다.

이를테면 참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말인데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바보 같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인생살이에는 그만한 진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선우용녀 친정어머니는 그녀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울 같은 존재였습니다. 소탈하고 욕심이 없는 점도 친정어머니를 닮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구순이 넘어서도 정정했던 친정어머니는 결국 100살이 되던 해 끝내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당시 일일시트콤과 예능 방송 세 바퀴에 출연 중이었던 선우용녀는 모친상을 당했지만,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예정된 스케줄은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방송 스케줄을 펑크 내지 않고 모든 촬영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별세 당시 선우용녀는 남편도 오토바이 사고를 크게 당했던 상태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사고 이후 7년이나 남편의 병시중을 했지만, 남편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7년을 투병하다가 끝내 별세하게 됩니다.

뇌경색

젊은 시절 빚쟁이 남편을 만나 평생 스스로 벌어 살며 남편 복도 참 없었던 선우용녀의 인생 실현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에 이어 남편까지 하늘나라로 보내며 슬픔에 잠겨 있던 그녀에게 어느 날 뇌경색이라는 무서운 질병이 찾아오게 됩니다. 선우용녀는 어느 날 건강 프로그램 방송을 녹화하고 있었는데 녹화 도중 손을 들었는데도 뚝 떨어졌다고 합니다.

당시 패널로 참석했던 의사들이 선우용녀에게 얼른 병원에 가라고 권고했고 응급실로 가게 된 그녀는 뇌경색 진단을 받게 됩니다. 그때 병원에 가지 않았더라면 하마터면 골든타임을 놓칠 뻔했던 위험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그녀는 뇌경색이 오기 전 망막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신발을 신으려고 하는 순간 오른쪽 눈에서 출혈이 발생했고 오른쪽 눈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3개월 후에 출혈된 눈을 수술했습니다. 그리고 6개월 이후 뇌경색이 오게 된 것입니다. 알고 보니 망막 출혈은 뇌경색의 전조 증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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