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세 가수 정수라는 몸이 망가질 대로 다 망가지고 충격 선택까지 하게 됩니다.” 과연 어떤 상황인지 확인해 보세요.

2005년 변진섭의 소개로 사업가 장 모 씨를 만나 41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결혼했던 가수 정수라는 당시만 하더라도 인터뷰를 통해 고백하길 “내가 결혼을 늦게 한 이유가 한 집안의 가장이기 때문이다. 홀어머니와 장애인 언니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에 평생 결혼을 안 하고 살게 될 줄 알았는데 내가 웨딩드레스를 입다니 생각도 하지 못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가수로 데뷔한 뒤 20년 이상 쉼 없이 달려오는 동안, 어느 순간 나도 지쳐서 더 이상 가수로서의 삶이 사실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우리 남편이 나타나 힘들고 지쳐있던 나를 구제해 주웠고 이후 나의 삶은 하루하루가 행복했다고 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결혼 7년 만에 이혼하며 훗날 다시 방송에 나와 불행했던 결혼 생활과 이혼에 대해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어떤 상황이 발생했는지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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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과거

시간을 거슬러 1963년에 태어난 정수라는 가수 시절 밝고 힘찬 노래를 많이 부르다 보니 이미지처럼 부잣집 막내딸처럼 자랐을 것 같지만 어릴 때부터 남들과는 다르게 힘든 시련과 슬픔들로 가득 차 굉장히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나게 됩니다. 당시 반신불수가 되어 장애인이 된 언니와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 그리고 생계를 위해 학업마저 포기해야 했던 중학생 큰오빠까지 어린 정수라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시련들이었습니다.

이처럼 가정형편이 어려워 지금으로써는 믿기 힘들겠지만, 그녀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동네 오빠의 소개로 밤무대를 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점차 소문이 나더니 당시 최고 인기 꼬마 가수로 통하게 되었습니다.

가수로 데뷔 & 활동

그리고 그녀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74년에는 제1의 한국 가요제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가수 함중아가 생애 처음으로 노래를 만들어서 이 대회의 노래를 출품하기 위해 가수를 찾던 중 당시 소곡동 라스베이거스라는 업소에서 기가 막히게 노래하는 꼬마에 대한 소문을 듣고 정수라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함중아가 정수라를 찾아갔더니 노래를 기가 막히게 할뿐더러 춤까지 너무 잘 추자, 그때부터 한 달간 연습시키게 됩니다. 이후 종소리라는 노래로 대회에 나가 인기상을 받았고 이때부터 정수라는 전국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이후부터 그녀의 꿈은 진짜 가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미성년자는 방송 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졸업할 때까지는 CM송을 불러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1.000곡 이상이나 부르면서 cm송 여신에 등극하게 됩니다. 그렇게 CM송이나 만화영화 주제가 등에서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하던 중 그녀가 성인이 된 1982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무렵은 전두환의 5공 독재가 무르익고 있던 시기로, 국내 가수들의 음반에는 무조건 건전 가요를 수록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정수라가 발표한 아!! 대한민국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마침내 최고 인기가수 대열에 올라서게 됩니다. 그렇게 아! 대한민국은 그녀를 스타덤에 올려준 대표곡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제2의 애국가라고 불릴 정도로 전두환 정권의 체제의 홍보용으로 지겹게 활용되었습니다.

한때 정수라를 보고 어용 가수, 관제 가수라는 소리를 할 정도로 곱게 보지 않았던 시선이 존재하기도 했습니다. 어찌 됐든 이후에도 그녀는 풀잎 이슬, 난 너에게, 환희 등 꾸준히 히트곡을 내며 명실상부 80년대에 최고의 가수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때 당시 가요톱10에서 무려 21번의 1위를 차지하며 조용필과 이선희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1위를 많이 차지한 가수가 되기도 합니다.

미국 진출과 루머

하지만 1988년의 환희를 끝으로 TV 활동을 자제하더니 뜬금없이 미국 진출을 계획하며 미국으로 떠나버렸고, 그때 마이클 잭슨의 형인 저메인 잭슨과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어쩌면 그녀가 제1의 한류 스타가 될 수 있었으나, 앨범 발매가 무산되는 등 그다지 큰 성과는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무렵 그녀가 미국에 간 사이에 공백기로 인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루머들이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당시에 그녀가 미국에 간 것도 재벌 총수의 아들을 몰래 낳기 위해 갔고 대가로 500억을 받았다, 아파트 한 동을 받았다., 서울 대형병원의 대표이사가 되었다라는 등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 나돌게 됩니다.

이처럼 듣기에도 민망한 루머들이 퍼지자, 당시 그녀가 방송, 잡지 등 매체마다 해명 인터뷰를 했음에도 그때뿐이지, 날이 갈수록 루머는 더욱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때는 인터넷 같은 게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정수라뿐만 아니라, 많은 연예인이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유언비어, 헛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로 그녀와 동부이촌동 목욕탕 친구였던 가수 현미가 하루는 목욕탕에 있던 옆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됩니다. 어떤 한 사람이 “정수라가 기업 회장의 애를 낳았는데 자신이 그 돌잔치에 갔다가 오는 길이다.”라며 엄청나게 기획력 있게 거짓말을 하길래 가수 현미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목욕탕 사람들과 싸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당시만 하더라도 이런 대부분의 출처 없는 소문들은 일부 연예 기자 등에 의해 더욱 악의적으로 부풀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결혼

아무튼 정수라는 루머와 더불어 이후 점차 가요계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2005년 가수 변진섭의 소개로 사기꾼 남편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그녀의 남편은 중견 규모의 건설사 대표이사직을 맡긴 했으나,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 배서란에 대표이사 서명을 해 5억 5천만 원을 속여 뺏은 혐의를 받고 구속된 바 있는, 사실상 사기꾼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걸 몰랐던 정수라는 6년 동안이나 남편의 사업 자금 20억 원을 지원하며 그야말로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당시를 그녀가 고백하길 “가수로서 열심히 사는 가운데 나이를 먹고 세월이 흘러 어느 순간 지치게 되었다. 그리고 도피라면 도피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이제는 뭔가 여유 있게 좀 살고 싶은 마음에서 선택한 게 결혼이었다.” “그리고 나는 진짜 사랑이었는데 그 사람은 처음부터 모든 게 계획된 일로 사랑이 아니었다. 보통 여자 연예인들이 사업하는 남자를 만나면 잘 되길 바라며 자금을 지원하다 보니 결국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하면서 7년 동안 20억 정도를 날리고 집까지 다 넘어갔다.

또한 “그 사람은 여자의 촉이나 피부를 못 느낄 정도로 철저하게 자신을 숨겼고 심지어 끝에는 남편 때문에 엄마의 집마저 이미 경매로 넘어가는데도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이때 나는 사느냐, 하늘로 가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한 달 반 동안이나 소주와 라면만 먹으며 몸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고 그렇게 메일을 해서는 안 될 나쁜 생각까지 하며 삶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그럼에도 혼자인 엄마와 장애인 언니 때문에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 무렵 내가 폐인처럼 지내니까 하루는 엄마가 돈 5천만 원을 내 손에 쥐여주게 되는데 알고 보니 결혼 후 용돈을 드렸던 걸 노인네가 고스란히 적금을 들어서 그대로 다시 나에게 쥐여주는데 이후 무조건 살아야겠다 싶더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결국 2013년 11월 정수라는 이혼 소송에서 승소하게 되었고 법원에서는 남편 장 씨가 정수라에게 경제적 손실을 크게 입히고 그 과정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며 위자료 7천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정수라 그녀가 고백하길 “사람들은 가끔 그럼에도 다시 사랑하고 싶냐고 묻는데 사실 아직은 남자가 무섭다. 그리고 지금은 더 열심히 달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내 일을 꿈꾸기보단 오늘 하루에 집중하며 산다. 오늘 주어진 이 시간에 내가 무대에 올라가든, 뭘 하든 마지막 날처럼 살려고 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국제 구호단체를 통해 일주일 동안 에티오피아 어린이 3명을 만나고 왔는데,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집에서 흙탕물을 마시며 사는 아이들의 환경을 보니 내가 겪어온 힘든 시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더라. 그런데 그런 환경 속에서도 아이들이 책임져야 할 가족을 생각하는 걸 보니까, 이 나이가 돼서야 그래도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라는 걸 느꼈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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