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세계 군사혁명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군사혁명 정리

냉전 초기 1950년대 ∼ 1970년대 말 대표적인 군사적 대결은 핵무기였다. 미국과 소련 모두 핵무기의 절대적 유용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는 제1ㆍ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산업문명이 절정에 달하면서 경제분야의 대량생산과 마찬가지로 군사분야에서는 대량파괴가 이 시기의 중심원리로 부상했다. 이로 인한 양진영의 군사전략은 상호확증파괴전략을 취하였으며, 이를 통해 공포의 균형을 유지해왔다. 그래서 만약 핵무기를 사용해야하는 상황이 올 경우 상대방의 요격 또는 선제공격으로 저지당하지 않기 위해 장거리 타격체계 개발에 주력했다. 대표적인 장거리 무기체계는 로켓과학기술과 결합된 ICBM, SLBM과 내연기관 발전에 따른 장거리 전략 폭격기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핵 공격을 결심하기 위해선 적이 자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며, 적이 공격하기 전 선제적으로 공격하기 위해선 신뢰도가 높은 첩보를 수집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했고 이는 조기경보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선 각종 정찰체계도 함께 지속적으로 개발이 되었고, 이러한 결과는 장거리 항공정찰뿐만 아니라 위성을 이용한 군사정찰활동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핵무기 사용과 관련된 상호확증파괴전략은 중요한 맹점이 있었다.

핵무기는 고강도 분쟁상황 발생시 군사력을 활용한 적국의 정치적 의지를 굴복 시킬 수 있는 최대효과를 가진 절대무기였으나, 저강도 분쟁상황 발생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전략은 비판을 받았고, 핵전쟁 및 제한전에 동시 대비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소련은 1970년 이후 요격미사일 위주의 생존전략을 추구하고, 재래식 전력에 의한 신속성 있는 선제공격을 강조한 상호확증생존전략을 채택하였고, 미국은 적의 도발형태와 상황에 따라 핵에는 핵으로, 소규모 분쟁에는 재래식 전력으로 유연하게 대응하겠다는 신축대응전략을 채택한다.

이러한 군사전략수정은 1970년대에 이뤄졌지만 당시 미국을 비롯한 NATO의 재래식 무기체계 측면에서 전략적 상황은 불리했다. 미국은 월남전에서 실패했고, 국내에서는 반전여론이 강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제3세계의 3류 군대와 싸워 무기력하게 패배한 군대가 바르샤바 동맹군(소련군)과 유럽에서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바르샤바 동맹군(소련군)은 수적으로 나토군(미군)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했고, 특히, 소련군이 전선후방에 배치한 기갑기동군으로 기동전을 수행할 경우 나토군을 단기간 내 마비시킬 가능성이 있었으며, 나토군은 이러한 위협을 사실상 핵무기에 상당히 의존해서 억제하고 있는 중이었다. 불리한 유럽의 상황을 타개하고자 찾은 해결방안은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에서였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수적으로 절대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수세적 방어 전투방식을 취하지 않고, 시리아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역공을 함으로써 적의 전열을 흩트리고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 전쟁의 교훈은 수적으로 열세이나 기술적으로 우세한 군대가 수적으로 우세하나 기술적으로 열세인 군대와 싸워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즉, 미군 지도자 계층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소련군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새로운 전장 프레임 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욤키푸르 전쟁에서 얻은 교훈을 토대로 미군은 8년 이상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1982년에 야전교범 FM 100-5, Operations에 공지전투라는 개념을 등장시켰다. 공지전투는 전쟁수행개념을 수세적 진지방어전에서 공세적 기동공격으로, 군별 작전운영에서 공ㆍ지 합동 통합작전개념으로, 근접전투에서 종심전투로 과감하게 전환시켰다.

이 교리를 이용하여 미군은 “종심감시-종심통제-종심타 격체계”를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전력체계는 걸프전 당시 큰 위력을 발휘했다. 1991년에 발발한 걸프전은 현대전의 효시이다. 냉전기간 개발한 공지전투 개념은 걸프전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이러한 걸프전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3차 산업혁명 시기의 첫 전쟁이라는 점이다. 걸프전 이후 명확하게 전쟁의 양상은 과거와 달라졌고, 이것은 아래의 표를 보듯이 군사혁명이 분명히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기술적 영향은 사회구조를 변화시켰고, 사회구조의 변화는 결과적으로 인간사회에서 갈등과 분쟁의 양상을 변화시켰으며 힘의 불균형을 야기한다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반면, 군사부분에 있어서 산업혁명의 기술적 영향은 다소 있었으나, 이를 효 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수행개념이 없으면 피아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는 Benjamin M. jensen의 『Forging the Sword-Doctrinal Change in the U.S. Army』에서 언급했던 충격과 경쟁(Shock and Competition)과 같은 의미의 맥락이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걸프전에서 미국이 보여준 군사혁명은 Jensen이 설명한 문화적 자기선택(Cultural Self-Selection)의 결과였다. 즉, 동등한 과학기술의 수준을 가지고 있는 상태라면 외교적으로 전쟁을 억제할 수 있겠지만, 이를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수행개념이 없으면 불리하거나 위태롭다. 반면, 수행개념만 있고 그에 상응하는 과학기술이 받쳐 주지 못한다면 유형적 전투력에서 밀려 불리하거나 위태로우며 외교적으로도 전쟁을 억제하기가 어려워진다. 만약 둘 다 없으면 힘의 불균형이 굉장히 심화되어 위태로워진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갈등과 분쟁의 과정 중 먼저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선 반드시 상대방이 가지고 있지 않은 효과적인 작전수행개념(교리)을 확보하고, 동시에 이러한 작전수행개념에 적용가능한 당시대의 주요한 또는 유망한 기술들을 개발 또는 발전시켜 주변국보다 우위의 수준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우현. “4차 산업혁명시대의 한국군 발전방향.” 국내석사학위논문 대진대학교 통일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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