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해 아들 죽인 뺑소니 범에게 이럴수가…” 어떤 사연인지 확인해 보세요.

영원히 일요일의 남자일 것 같았던 송해님이 그리던 아들 곁으로 떠났습니다. 송해 선생님 후임으로 누가 전국 노래 자랑을 이끌어갈지 사람들의 관심이 정말 높아서 발표 이후에는 속보로까지 등장할 정도였는데요. 새로운 MC는 방송인 김신영이 맡게 되었죠. 이에 송해님의 가슴 아픈 가족사와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적이 있다는 소식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송해님은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해 아들이 오토바이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밝힌 적이 있죠. 그런데 여기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송해님 아들의 교통사고는 뺑소니 사고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고의 가해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송해
👉”배우 박근형 투병을 숨기고 2달간 촬영을 강행하다 결국….” 너무 안타까운 그의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송해님의 과거

송해님은 한국 현대사의 전설이 아니실까요. 말로만 듣던 6.25 전쟁까지 참전하셨고 고향을 두고 멀리 북한에서 내려오셨으니 얼마나 많은 인생의 겹겹을 쌓아오셨을까요. 실향민으로 내려와 힘듦과 싸우시던 시절!! 군대선임이 소개해준 여동생은 송해님에게 전부였고 가족이었습니다.

월남 후 한국 전쟁 중 모스 부호를 다루는 병사로 선발된 송해님은 많은 프로그램에 나와 “쯔쯔쯔 쯔쯔쯔”라고 소리 내며 당신도 잊히지 않는 모스 부호에 대해 말을 하곤 하셨죠. 군 제대 후에는 악극단에 입단해 목탄차를 타고 전국을 돌며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다 방송국에 들어가 구봉서 배삼룡 이기동 서영춘 등 기라성 같은 원로 희극인들과 공연을 했으며 몇몇 장면은 우리 희극 공연사에 여전히 회자되기도 하는데요.

TBC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전국 노래 자랑의 원형이 되는 프로그램을 맡아 특히 운전 기사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건 뒤에 올 굉장한 크기의 불행을 앞둔 전조였을까요.

방송도 평탄하고 그의 인생에 큰 기류는 없을 듯했던 무렵이었는데요. 송해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싶어 했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오토바이 사랑을 막아보고자 부품을 전부 해체하며 결사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20대의 혈기 그리고 이를 이기지 못한 어머니의 마음이 오토바이로 가는 아들의 의지를 막지 못했죠.

아들은 한남대교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던 중 트럭 운전자의 불법 유턴으로 오토바이와 트럭이 추돌하는 뺑소니 사고로 세상을 하직하고 맙니다.

아들의 사고

방송에서 송해님은 라디오를 17년간 열심히 하던 때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병원에서 “한남대교 공사장에서 대학교 2학년이었던 아들이 오토바이를 탔다”고 연락이 와서 가봤더니 아들은 수술실로 들어갔고 빈 이동 침대만 있는데 머리를 감쌌던 붕대들만 수북했다고 합니다.

그걸 참아 볼 수가 없었다며 작은 수술실 틈으로 보는데 “아버지 살려줘 살려줘” 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죽는 것도 살리는 사람으로 알고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돌보지를 못했다”라며 진한 부정을 보였습니다. 송해님은 그걸 서서 바라보는 게 참 힘들었고 여섯 시간을 넘긴 수술이었는데 혼수 상태에서 열흘 가까이 헤매고 떠났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습니다.

한남대교에서 일어난 뺑소니 사고의 목격자로는 방송인 허참과 다수의 목격자들이 있었고 그 덕에 뺑소니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들을 죽인 가해자가 너무도 원망스러웠을 텐데 마침내 원수와도 같은 가해자와 직접 대면하게 된 송해 선생님은 놀라운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들을 죽인 가해자를 눈앞에서 보게 된다면 어떤 심정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데 여기에는 송해님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고 합니다.

뺑소니 운전자의 정체와 용서

사람은 누구나 슬픔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자식과 부모에 대한 슬픔은 그 어떤 슬픔보다 더 애잔함과 그걸 듣는 사람까지 숙연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들게 하는데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던 송해님은 사고를 일으킨 가해자를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줘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겼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넓은 사람도 선뜻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어떤 마음으로 그를 용서하게 되었을지 감히 가늠도 하기 어렵습니다. 아들을 못 잊은 송해님은 극단적 시도 그리고 가로수를 누비며 나는 교통방송을 하차 그리고 끝까지 한남대교 근처는 참아 갈 수 없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해 선생님은 뺑소니 트럭 운전자를 용서했다고 하는데요. 송해님은 교통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친 트럭 운전자를 용서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트럭을 운전하는 사람이면 생활이 넉넉한 사람은 아니었겠지 내가 그 사람을 처벌하면 그 사람 가족은 또 무슨 수로 생계를 유지하겠나 그래서 포기했어 그리고 예로부터 악에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잖아 그리고 우리 아들에게 전혀 과실이 없다고 할 수도 없고 말이야” 당시 사고를 냈던 가해자는 트럭 운전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트럭 운전하며 가족을 벌어 먹이는데 구속되면 그 가족은 어쩌겠냐 용서하셨다고 하는데 정말 마음이 따뜻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극단적 선택

송해님은 아들을 잃은 슬픔의 극단적인 선택까지 했다고 고백했는데요. 송해님은 아들을 잃은 이후 모든 걸 내려놓고 지내다 남산에 올랐는데 알 수 없는 기운에 홀려 아들도 없는 세상 왜 사냐는 환청이 들리더라면서 나도 모르게 낭떠러지 앞으로 뛰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정신을 차리니 내가 소나무에 걸려 있었다며 얼마나 창피했나 모른다고 아찔했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송해님은 어린 것들이 엄마 아빠한테 응석 부리는 걸 보면 난 못 해줬는데라는 생각이 들고 혼자의 시간을 가질 때 그 생각이 잊히지 않는다고 말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는데요.

방송하차

당시 송해님은 충격으로 17년간 진행해 온 동아방송 라디오 “가로수를 누미며”에서 하차했고 그 후로는 사고가 난 한남대교를 건너가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송해님은 생전 가수가 되겠다는 아들의 꿈을 반대했는데 최근 공개된 한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아들의 습작기에 음악이 공개되었죠.

셋째 딸이 오빠가 선물한 카세트 테이프들을 지금까지 다수 보관하고 있었고 그 중에는 자작곡으로 채워진 4개의 테이프가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송해님은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영화 제작진들은 인터뷰를 가장한 서프라이즈로 송해 선생님의 마지막 인터뷰를 진행하다가 테이프에 수록된 노래 한 곡을 틀어드렸는데 누가 부르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음에도 듣다가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흘리셨죠.

자신도 딴따라를 반대하는 아버지와 부딪혔지만 직접 힘겨운 연예계 생활을 겪은 후론 아들의 생전 가수 꿈을 반대했었는데요. 송해님은 솔직히 아버지 노릇을 못했다고 고백하며 “세대의 변화가 너무 빠르게 오기 때문에 미쳐 그런 얘기 주고받을 사이 없이 살다 아이를 파악하지 못했다. 자격이 잃은 아버지로서 대단히 후회가 컸다”고 말했죠.

방송복귀

아들을 잃은 슬픔의 방송을 쉬는 그에게 당시 전국 노래자랑의 피디였던 안인기가 직접 찾아가 송해님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안인기 PD는 “송 선생님 이렇게 쉬고 계실 때가 아니올시다 우리 바람이나 쐬러 다닙시다”라고 말에 다시 마음을 다잡고 방송에 복귀하게 되었죠.

그렇게 송해님은 아들을 가슴에 묻고 국민들의 즐거움과 웃음을 위해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송해님은 슬픔을 사귀고 아픔을 저며가며 방송에 임했고 사람들은 그게 그의 길이라고들 말했죠. 스트레스가 상당했는지 음주량이 과했지만 같이 마신 후배들을 업어서 귀가시킬 정도로 체력과 주량이 왕성했고 아직도 그의 주량에 관한 전설들이 연예가에서 흘러나오기도 합니다.

노래 자랑 스태프들은 이튿날 촬영을 앞두고 쉬었으면 좋겠는데 자꾸만 술자리를 권했던 그의 속내를 알면서도 흔쾌히 응하지 못했던 마음이 아쉬웠다고 어느 자리에서 털어놓았는데요. 술잔을 마다했을 때 눈에 띄게 부쩍 서운하게 보였던 그의 표정까지도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유명한 일화

송해님은 뼛속까지 코미디언이었고 어떤 권위와 엄숙주의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죠. 전국 노래자랑 녹화전에 피디와 작가랑 군수와 저녁을 하며 그 지역에 대한 정보를 듣는데 녹화 당일 군수가 올라가 인사말도 하고 노래도 한 소절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편집되어 방송에는 나가지 않는데요. 근데 어느 군수가 군수 체면에 방정맞게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하자 송해는 싸늘하게 저녁 자리를 일찍 파하고 “저 사람 아직 덜 부서졌어 군민이 없는 군수가 어디 있어”라고 말했고 결국 그 싸구려 군수를 송해님은 무대에 올리지 않았죠.

한 번은 녹화 들어가는 순간 군청 직원이 플라스틱 의자 몇 개를 무대 제일 앞자리에 놓자 송해님이 그 이유를 물었는데 “이 지역 국회의원과 군수님 군의장 자리를 만들려고요”라고 하자 송해님은 마이크를 돌리고 서슬퍼렇게 호통을 쳤고 당황한 공무원들은 의자를 치웠다고 합니다.


2013년 5월 창녕 노래 자랑에 송해님이 월남 맹호부대 위문 공연 때 함께 찍은 사진이라며 정기세 병장 할아버지가 송해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들고 출연했죠.

그가 해운대 엘레지를 부르는데 박자가 불안하자 심사위원이 땡을 두 번이나 쳤지만 송해님은 그것을 무시하고 전기세 병장과 그 노래를 끝까지 완창했습니다.

검소한 생활

송해님은 생전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돈을 쓰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천 원짜리 국밥을 즐겼고 4천 원짜리 이발소에서 머리를 했습니다 시민들 속에서 함께 거리를 오가다 붕어빵을 사 먹었고 일반 대중 목욕탕에서 시민들과 함께 목욕했죠.

방송 녹화 등 다른 스케줄이 없으면 늘 개인 사무실이 있는 서울 종로구 낙원동을 찾은 송혜 님은 단골집으로 유명한 인근에 2천 원 국밥집을 찾아 혼자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4천 원짜리 이발소 붕어빵 가게에 매일 오후 4시에 찾았다는 대중 목욕탕 등도 모두 이 부근에 위치해 있고 지금은 송해님이 자주 오가던 낙원동에 아예 송해길이 생겼습니다.

2천 원 국밥집 단골이 된 이유는 술을 마신 다음 날 이곳을 찾아 우거지 국밥으로 속을 달래곤 했기 때문인데요. 송해님은 연예계에서 유명한 애주가로 술은 소주만 마셨다고 하죠. 비싸고 좋은 술도 많지만 송해님은 젊은 시절부터 소주만 마셨고 한창 때는 하루 십 병을 넘게 마시곤 했다고 합니다.

아흔 살을 넘기고도 하루 소주 3병은 마셨을 정도라고 하는데요. 안주는 아귀찜을 즐겼고 소주는 도수가 높은 빨간 뚜껑 소주를 좋아했는데 이를 빨간 딱지 소주라고 불렀다고 하죠.

35년 동안 국민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하셨던 송해님을 잊지 않겠습니다. 아픔 없는 행복한 곳에서 아들과 함께 편안하게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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