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기야 나도 13년간 당했어..: 김완선은 이승기와 지독히 똑같은 성장 과정을 겪었습니다.

음원 수익 정산으로 소속사와 갈등을 겪고 있는 가수 겸 배우 이승기의 이야기가 연예 뉴스면을 연일 장식하고 있습니다. 사실 연예인과 소속사 간의 정상 갈등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특히 톱스타들도 이 분쟁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수 김완선이 과거의 정산을 받지 못하고 활동한 사연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이승기는 18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소속사에서 활동하며 가족처럼 관계를 의지해 왔습니다. 그런데 김완선은 실제로 가족에게 13년간 수익금을 단 한 푼도 정산받지 못 했습니다. 심지어 이승기의 경우에는 음원 수익 외의 방송 및 작품 활동에 관련된 정산을 제대로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완선은 데뷔 이후 전성기를 휩쓸었어도 그 수익금의 행방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바로 당시 김완선의 매니저였던 이모 한백희가 멋모르는 어린 조카의 수익금을 모두 가로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이모와 조카 사이였다 한들 김완선은 왜 정산을 한 푼도 받지 못했던 것일까요?

김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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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선의 매니저 한백희

김완선의 과거 매니저 한백희는 이모와 조카 사이를 떠나 당대 최고의 여가수들을 발굴한 안목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한국 최초 여성 매니저로 이 또한 현재 이승기와 분쟁을 겪고 있는 후크 엔터의 권진영 대표와 상응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권진영 대표 역시 이선희의 매니저를 맡으면서 회사를 키우기 시작해 이후 연예인으로 이승기를 키워냈습니다. 한백희는 스스로가 미팔군 가수 출신이었으며 인순이를 발굴했던 스타 메이커였습니다. 김완선은 시대를 앞서간 한백희의 스타 육성법에 따라 성장하게 됩니다.

“연습생 시절 이모의 집이 있는 도봉구 방학동의 4층 건물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연습만 죽어라 했어요. 오전에는 노래 연습, 점심에는 음악 공부, 저녁에는 춤 연습 등 하루 일과가 빽빽했어요. 이렇게 7년 동안 감금된 생활을 했어요. 어느 사람도 만날 수가 없었어요. 내가 가수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고 있을 때 이수만 씨가 사무실에 놀러 왔었어요. 당시에는 거의 없었던 시도였기에 많이 놀랐을 것 같아요.”

이승기와 비슷한 성장 과정

김완선이 아주 어릴 때부터 이모의 손에 의하여 스타로 양육되는데 철저하게 이모의 계산대로 성장하게 됩니다. “내가 인순이 씨의 리듬 터치에서 가수 데뷔를 준비하던 15살 때부터 작곡가 신병하 씨로부터 화성학과 오케스트라 편곡을 배웠어요. 당시에 곡도 몇 곡 썼는데 너무 서정적이다. 이미지와 안 맞는다라고 이모가 평가했고 결국 앨범에 실을 수가 없었어요. 이모가 내가 쓴 곡이 내 이미지와 다르다라고 했어요. 내가 당시에 반항심이 컸는데 마음의 상처를 받고는 작곡을 포기해버렸어요. 내가 그때 왜 포기해 버렸을까? 지금도 후회가 돼요.”

김완선이 인순이의 리듬 터치에서 백댄서로 활동한 것은 무대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좋은 경험이 되었지만, 이모의 틀에 맞추기 위하여 작곡에 대하여 핀잔을 한 것은 어린 김완선의 가능성을 짓밟은 행동이 되었습니다. 이마저도 이승기가 겪은 일과 비슷합니다.

가스라이팅

이승기는 오랜 시간 동안 권진영 대표로부터 마이너스 가수라는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자신의 능력으로 갉아먹었습니다. 노래를 내기만 하면 늘 1위를 차지하던 이승기가 마이너스 가수라는 것 자체가 이승기 외의 모든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김완선도 이모에 의해 철저하게 스타로 길러집니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보이는 가스라이팅이 김완선에게도 가해집니다. 김완선은 이모와 점차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3집 정도 내니까 제가 한국 나이로 스무 살 정도였어요. 막 자아가 생기려고 할 때였는데, 그걸 이모가 억눌렀죠.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자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타이틀 곡 선정부터 무대의상, 메이크업 심지어 인터뷰에 응하는 대답들까지도 전부 이모가 시키는 대로 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저 자신이 점점 위축되고 작아져 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이러한 부분에 더하여 이모 한백희의 고도의 전략은 어린 김완선의 마음을 상처투성이로 만듭니다. 가수할 때는 매일 혼만 났어요. 그래서 나는 늘 자신감이 없었어요.

13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수익 정산

“무대에서 노래를 다 부르고 나면 이모에게 혼날까 봐 내려오기 싫은 정도였어요. 다른 가수나 매니저들은 그런 나를 보고 쟤 또 깨지는구나라고 불쌍해하기도 했어요. 나는 늘 모자라고 못난 아이라는 생각에 주눅이 들었어요. 칭찬받는 게 행복한 일인지도 몰랐어요.” 김완선은 이모와 음악 내적인 갈등 관계 외에도 수입 정산 문제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모와 함께 활동하던 13년 동안 단 한 번도 돈을 받지 못했어요. 이모는 원래 검소한 사람이에요.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해요. 이상한 남자를 만나면 인생이 불행해져요. 차라리 이모가 그 돈을 자신에게 썼더라면 덜 억울했을 거예요. 내 전성기에 한 달 수입은 당시 아파트도 3채를 살 정도였어요. 하지만 난 그 돈을 본 적도 없어요.

이모와 계약서도 쓰지 않고 13년 동안 활동했는데 이모부가 사업을 하다 14억 원가량의 부도를 냈어요. 그래서 내가 버는 돈이 모두 빚을 갚는 데 쓰였어요.” 그렇게 김완선은 이모와 1998년 결별하게 됩니다. 김완선은 이모와 결별하고 오히려 승승장구했습니다.

이모와의 마지막 대화

5집에 수록된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가 히트를 치면서 여가수 최초 단일 앨범 100만 장 판매액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이승기와 달리 김완선의 경우에는 진짜 가족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완전히 인연을 끊기는 어려웠습니다.

한백희가 2006년 당뇨병으로 별세하는데 그전부터 응급실에 갈 돈이 없어서 김완선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 요청을 김완선이 뿌리치지 못한 것입니다. “참다못해 이모를 찾아가서 따졌어요. 그러기에 진작 나한테 돈 좀 주지 돈을 조금이라도 줬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라고 하자, 이모가 미안하다. 완선아!! 미안해.라며 눈물을 흘렸어요.

그 대화가 마지막이었어요. 결국 이모와는 마지막까지 화해하지 못했어요. 내가 용서해야 하는지 아니면 용서받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애증의 관계

김완선은 이모를 보낸 뒤 슬럼프로 2007년 은퇴설까지 불거졌습니다. “하와이에 갔는데 이모 생각만 한없이 났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김완선은 이모와의 일을 방송에서 공개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모 얘기를 하고 나서 가족으로서 그런 얘기를 전부 다 해야 했을까?라는 후회가 되었어요.

나는 이모를 좋아했어요. 그렇게 매력 있고 똑똑하고 카리스마 있는 분은 아직도 보지 못했어요. 원래 돈이라는 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거예요. 이모와 좋았던 때는 밤을 새우며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모와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방송에서 내 삶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야기했어요.” 이렇게 김완선은 이모 한백희에 대하여 애증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김완선은 성인이 채 되지 않은 10대 후반에 대비하여 돈 관리에 대해 잘 몰랐고, 돈보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고 합니다.

당시 김완선은 한 달 평균 10억 원, 매년 100억 원 이상을 벌었지만, 수익금의 행방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모 한백희는 13년 동안 조카의 수입을 빼돌렸음에도 남편의 빚을 갚는 데 쓰며, 이마저도 모자라 빚에 허덕였습니다. 김완선도 그랬듯이 차라리 이모가 썼다면 덜 억울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김완선과 이승기의 차이점

그런데 이승기의 경우에는 권진영 대표가 철저하게 자신을 위해 돈을 씁니다. 이 부분에서는 이승기와 김완선의 차이점이 보이는 부분입니다. 이렇듯 학생 신분일 때부터 연예계에 뛰어들며 아직 판단이 잘 서지 않는 나이부터 받은 가스라이팅은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 충분했습니다. 오랜 연예계 고질병이지만 부디 더 이상은 이러한 부당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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