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72세 박일 2번의 이혼 4자녀 홀로 키우다 결국…” 그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클린트 이스트우드, 알파치노, 피어스 브로스넌의 목소리를 책임지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성우 박일입니다. 박일은 외화 더빙하면 그가 자연스럽게 연상될 정도로 왕성한 더빙 활동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 드라마 배우로도 왕성한 활동을 했었습니다. 박일은 배우 성우 쇼 프로 진행까지 하며 톱스타급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 시기에 박일은 팬레터를 상자 단위로 받을 만큼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대중에게는 큰 사랑을 받았지만 실제로 그의 사랑은 실패로만 끝났다고 합니다. 박일은 섣부른 선택으로 2번이나 이혼을 맞이하고 25년간 싱글대디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거기다가 아픈 아들의 병시중으로 긴 세월을 보내고, 결국 어느 날 갑자기 돌연사했다는 비보를 전해주며 많은 이들을 슬픔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요? 오늘은 박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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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인기

박일은 성우 중에서도 제법 잘생긴 얼굴로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좋은 목소리로 예능 프로그램에 MC를 맡은 것은 물론 배우 생활도 활발히 했습니다. 그는 최인호의 소설 원작인 1982년 이장호 감독에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에서는 무려 주연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자유 여자, 카페 여자, 바람 바람 바람, 여신의 늪 등에서도 주연을 꿰찼습니다. 조연이나 단역으로는 더 많은 작품에 등장해 그의 인기를 방증하기도 했습니다. 다수 작품의 주연을 맡을 정도라니 그가 그 이후로도 꾸준한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면 한 명의 국민 배우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성우에 대한 자부심

아쉽게도 촉망받는 배우와 MC로 다양한 방송 활동했던 그는 한 우물만 파자는 심정으로 배우, MC, 그 모든 자리를 마다하고 성우 활동에만 집중했습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그가 다름 아닌 성우라는 직업을 택했던 것은 그가 평소 성우라는 직업에 큰 자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우 활동을 하면서 성우 교육아카데미를 설립해 후진 양성에 매진하기도 했습니다.

밤무대 활동

하지만 그는 돌연 모든 활동을 접고 성우 활동에조차 공백기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훗날, 그가 직접 밝힌 방송 공백기의 이유는 밤무대 출연으로 인해서라고 합니다. 본인 발언으로는 그게 돈이 더 벌렸다고 합니다. 그는 밤무대에 오를 당시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고백했습니다. 밤무대에서 나훈아의 찻집의 고독을 불렀던 박일은 노래를 부르고 돌아서는 순간 나훈아와 눈이 마주쳤다고 합니다.

나훈아도 그 당시 무대 위에 오르기 위해 대기를 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원곡 가수 앞에서 노래를 불렀으니 얼마나 민망했을까요? 두 사람은 서로 말없이 웃기만 했다고 합니다. 배우나 성우로서의 재능은 있었지만, 가수 활동 전적이 없던 박일이 밤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건 의외입니다.

화려한 방송 생활을 뒤로 하고 돈을 많이 주는 음지로 그가 발걸음을 내디딘 것은 부양하는 가족이 많아서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었느냐?며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결혼

박일은 한 방송에서 25년간 자녀를 홀로 키우며 겪었던 고충을 털어놓아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싱글 대디’로 엄마와 아빠의 역할을 모두 해내며 4명의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냈습니다. 잘생긴 외모와 중후한 목소리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그가 결혼하지 않고 아이들을 홀로 키워냈다는 사실에 시청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는 이전에 2번의 결혼 경력이 있었습니다. 첫 결혼은 20살이란 어린 나이에 사귀고 있던 여자친구가 임신하는 바람에 68년에 식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아버지라는 위치는 그가 감당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결국 두 사람은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77년에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78년 동갑내기 연기자 김윤경과 두 번째 결혼했습니다. 박일은 일터에서 김윤경과 만나 사랑이 싹 되게 되었고 자녀를 홀로 키우면서 외로웠던 차에 순간적으로 불꽃이 타올라 쉽게 두 번째 결혼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 결혼 역시 섣부른 선택으로 5년 만에 이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박일은 총 4명의 아이를 홀로 키우기로 하고, 더는 결혼의 뜻을 품지 않았습니다.

끝없는 노력으로 병을 완치시킨 싱글대디

박일은 비록 결혼에 2번이나 실패했지만, 아버지가 지녀야 할 책임감만은 강했습니다. 아버지로서 엄마의 빈자리를 모두 채우기는 어려우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하며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박일은 25년간 4명의 아이를 홀로 키웠고 여느 아버지보다 자식 사랑이 깊습니다.

그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4남매를 훌륭하게 키웠을 뿐 아니라. 둘째 아들의 아토피까지 완치시켰다고 해서 놀라움을 안겼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라고 하지만 유난히 아픈 손가락이 있습니다. 박일에게 그 아픈 손가락은 바로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둘째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태열이 심했습니다. 그리고 사춘기 시절엔 아토피가 발병하며 잠들기 전 손을 묶어놓을 정도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성인이 되어 군대에 가기 위한 신체검사를 받았지만, 피부 문제 때문에 부적격 통보까지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대부분 가기 꺼리는 군대지만, 그의 둘째 아들은 어려서부터 자신 때문에 걱정하는 아버지께 군복 입은 모습을 보여드리는 순간을 꿈꿔왔었습니다.


결국 1년을 기다려 다시 신체검사를 받을 때까지 아토피 치료를 받은 후 3급 판정받아 당당히 훈련소로 입소했습니다. 아토피 증세가 심한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아버지는 못내 걱정됐지만, 머리를 깎고 당당히 입소하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2년 동안 복무 잘하고 돌아오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과는 달리, 훈련소에서부터 시작된 아토피 증세는 자대 배치받은 뒤 더욱 심해졌습니다.

결국 자대 배치 이후 몇 달이 지나, 군 관계자로부터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이송됐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병원에서 본 아들의 모습은 가슴이 아프다 못해 끔찍했습니다. 박일은 당시 상황에 대해 “사람이 아니라 거북이 같았어요. 머리부터 등 배까지 갈라지고, 피가 나서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더라고요.

눈물이 쏟아지는데 아픈 아이 앞에서 차마 눈물을 보일 수 없어서 오히려 괜찮다. 나을 수 있다.라고 위로했죠. 그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려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도저히 운전할 수가 없어서 몇 시간 동안 병원 근처를 서성이다가 돌아왔어요.”라고 회상했습니다. 일순간 회복하는 듯해 군 복무를 이어 나갔지만, 결국 아토피 증상은 심해졌고 아들은 의가사 제대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아들이 의가사 제대를 하는 날 안도에 한숨을 내쉬는 한편,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이후로도 둘째 아들은 증상이 심해졌습니다. 박일은 아들의 증세 호전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노력했습니다.

유명한 병원을 찾아가는 것은 물론 민간요법도 다 시도해 봤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노력에 아들의 아토피는 점점 양상이 좋아졌습니다. 결국 피부에 새살이 돋아났고 건강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박일은 아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회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돌연사

아쉽게도 그는 자기의 안위는 돌보지 못했습니다. 2019년 7월 30일 박일은 73세의 생일을 한 달 정도 앞두고 비보를 들려줬습니다. 지인들에 의하면 딱히 지병도 없던 사람이라 충격이 컸습니다. 그는 자택에서 잠을 자고 있던 도중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박일의 매니저가 그의 자택에 방문했을 때, 그는 이미 숨진 상태였습니다.

병원 측의 진단과 유가족의 상의 끝에 자연사로 결론 지어졌습니다. 그는 평소 건강에 이상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꾸준한 운동으로 건강한 몸 관리를 해왔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의 갑작스러운 소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박일은 향년 72세의 나이로 어떤 예고도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터라, 많은 사람이 충격을 금치 못했습니다.

배우, 성우, MC, 그야말로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박일, 그가 세상을 떠난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생전 따뜻하고 훌륭한 아버지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평생을 완치하기 힘든 아토피도 그의 지극정성 앞에는 소용이 없었는데, 홀로 아이 4명을 키우면서 힘든 일이 많았겠지만 그만큼 보람과 행복도 컸다고 합니다. 2019년 갑작스럽게 들려온 그의 비보로 성우극회는 물론 많은 사람이 슬퍼했습니다. 하늘에서는 편안히 휴식하기를 바라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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