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트로이카 배우 허진 쫄딱 망하고 파출소까지 도망간 안타까운 근황” 어떤 상황인지 지금 확인해 보세요.

트로이카로 상징되던 1970년대 여배우 전성시대의 한 축을 이루며 화려한 외모와 세련된 카리스마로 독보적인 연기 세계를 구축했던 배우 허진은 폭넓은 연기력으로 영화, 드라마 할 것 없이 종횡무진했고, 특히 섹시한 배역을 능숙하게 소화해 당시 남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면서 스크린과 브라운 간의 캐스팅 1순위였습니다.

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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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97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그녀는 당시 딱 40일 번 돈으로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고, 당대 가장 높은 몸값을 자랑하던 영화배우 신성일과 비슷한 출연료를 받을 만큼 많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녀의 전성기 때를 전원주가 고백하길 “나는 예전에 허진 옆에 앉지도 못했다.

언니 저것 좀 가져와. 언니 저것 좀 가져와. 얼마나 시건방지게 구는지 한 번은 촬영하다가 허진이가 그냥 집에 가버렸다. 얘가 가면 아무것도 못 찍는데 그래서 스태프들이 진이 잡아야 하는데…. 진이 잡아야 하는데…. 그런데도 무조건 나가더라.

그래서 나중에 뭐 때문에 삐져서 촬영장을 나갔는지 물어보니까, 밥 먹을 때 계란이 안 들어가서 그것 때문에 갔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사미자가 허진의 전성기에 대해 고백하길 “한 번은 허진이와 내가 드라마를 촬영하는데 얘는 웃음이 한 번 터지면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웃음이 터져 NG가 계속 났고 그래도 감독이 NG 내는 걸 3번까지는 봐줬지만, 이후에도 5~6번을 더 NG를 내자, 위에서 허진 저거 미친 거 아니야?라고 했고, 그 말을 허진한테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카메라맨 이어폰 너머로 한 말을 허진이가 들었다.

그 순간 허진이 돌변하면서 지금 나한테 뭐라고 그랬어? 미치면 뭐라고? 나 안 해 이거!라며 그리고 머리 가발부터 잡아당기고 그 씬 찍다가 가버렸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최고인 줄 알았던 어린 시절 연예계를 안하무인하게 주름 잡던 그녀였지만, 이후 단돈 300원이 없어 모든 걸 놔 버리고, 그대로 누워 있다가 세상을 떠나려고 했으며 심지어 한때 사랑했던 남편을 피해 파출소로 도망까지 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수입이 없어 촛불만 켠 채 삶의 기로에 서 있다고 했으며 설상 가상 자신을 촬영온 제작진에게 ‘본인이 최고의 연기상을 받은 사람인데 지금 어디 와서 껍죽거리냐?’며 촬영하지 말고 나가라고 하는 배우 허진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녀의 과거

1949년 전남 영광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허진은 넉넉한 가정 형편으로 어려서부터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예체능이나 글짓기에 소질이 있었고, 초등학생 때는 무용을 했는데 전국에서 최고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전국의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열린 글짓기 대회에서도 전국 4등을 차지해 학교지에 실리면서 당시 문학소녀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탄탄대로를 달리며 가난이라는 것에는 발끝도 되어보지 않았다는 그녀는 이때부터 자신은 이미 특별한 인생을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훗날 생각해 보니 이런 것들로 인해 그게 전부 사회생활에서는 마이너스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어찌 됐든 무용 쪽으로 상을 많이 받은 그녀는 대학교도 무용과로 진학하려고 했지만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허리 쪽에 무리가 많이 가면서 결국 무용을 포기하고 연극 영화과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기고만장, 안아무인, 독불장군

그렇게 한창 대학교 생활을 하던 중 일용 엄니의 김수미, 故 김영애와 같은 기수인 MBC 공채 탤런트 3기로 데뷔하게 됩니다. 그렇게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녀는 본인의 고백에 따르면 “처음부터 연기를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자신이 정말 톱스타라도 된 줄 알았다.”라고 했으며 실제로도 1970년대 그녀는 앞서 얘기한 대로 배우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당시 인기가 워낙에 많았던 탓인지 그녀의 콧대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습니다. 그중 한 예로, 당시 호랑이 감독으로 이름 높았던 신상옥 감독이 홍콩과 합작으로 제작했던 여수 407호라는 영화에서 앞서 전원주가 얘기했던 대로 그녀가 계란 하나의 촬영을 접고 집으로 가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전성기, 그녀의 고백에 의하면 “대통령도 자신을 보고 싶어 할 정도로 그녀 위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실제로 그 무섭다던 신상옥 감독마저도 그녀의 말도 안 되는 투정에 화내지도 못하고 그녀를 다독여줘야만 했다.”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교만했던 그녀는 1975년 KBS 드라마 셋방살이를 찍을 때, 구질구질한 월남치마가 창피하다며 또 촬영하다가 집으로 가버렸고, 배우 김진규와 함께 주연을 맡은 설태호 감독의 사랑이 있는 곳에서도 촬영할 때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집으로 가버리기도 했습니다.

훗날 이때를 그녀가 고백하길 “내가 배우로 데뷔 후 사람들이 처음부터 잘한다, 잘한다고 하니까 정말 톱스타라도 된 줄 알았다. 그리고 홍콩과 합작으로 제작했던여수 407호에서 고작 계란 하나 때문에 집에 갔던 이유는 홍콩 배우는 밥을 먹는 걸 보니까 계란을 주는데 우리 상에는 주지 않았다. 너무 치사한 이야기지만 그때 나에게는 그게 자존심이고 꽤 절대적이었으며 그래서 그냥 화장 케이스 들고 집에 가버렸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그런다.무식하면 용감하다`라고 뭘 모르는 사람한테는 정말 대책이 없는 것 같다. 나 같이 어린 애가 펑크를 내고 가버리니, 이게 말이 안 되니까 당시 감독님도 어이가 없어서 화도 제대로 안 나셨을 거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때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아마 대스타가 되어 있을 것이고 10층짜리 건물은 갖고 있을 거다. 그런데 참 성격이 그 사람의 인생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 난 기고만장했고 안하무인 했고 독불장군이었으며, 심지어 나는 만약 우리나라에서 일이 잘 안되면 우리나라에서도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까지 했다.”라고 했습니다.

결혼과 이혼

그렇게 불성실한 태도를 보인 그녀를 다시 불러주는 감독들은 점차 사라져 갔고, 그녀 역시 이러한 행동들로 방송국 눈 밖에 나면서 일이 점점 막혀버리게 되었습니다. 연예인에 대한 회의감이 깊어지자, 1982년 그녀는 돌연 2살 연상의 사업가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렇게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결혼했지만 무서운 남편을 피해 파출소에 가야 할 만큼 후회만 남은 선택이었습니다. 전성기 시절 도도함을 갖춘 그녀는 온데간데없었으며 현실의 그녀는 너무나도 연약했기에 결국 13개월 만에 파경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갈 곳이 없어지다

남편과 이혼 후 생계를 위해 다시 일거리가 필요했지만, 당시만 해도 방송계가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한 번 눈 밖에 나면 돌아오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연기 복귀에 대한 마음은 너무나도 간절했지만, 그녀를 불러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결국 수입이 없던 그녀가 생계를 이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세간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고, 또한 들어오는 건 없고 나가는 것만 있으니 막막했던 그녀는 집도 팔고, 차도 팔고, 나중에는 보석이면 옷, 신발, 가방들도 다 팔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1,800만 원 주고 산 밍크코트가 있었는데 그 코트를 들고 전당포로 향하는 자신이 너무 창피해서 길에서 펑펑 울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아끼던 물건을 하나, 둘씩 처분하며 생계를 이어갔지만 물건들조차 점점 바닥을 드러내면서 더 이상 팔 곳이 없어지자, 그때 그녀에게 수중에 남은 돈은 700원뿐이었습니다. 당시 먹고 싶은 음료수가 1,000원인데 300원이 없어 못 먹는 자신을 보며 그때 그녀는 끝내 모든 걸 놓아버렸습니다.

벼랑 끝에서 다시 찾은 기회

결국 이렇게 있다가 있는 거 다 떨어지고, 그러면 방에서 이렇게 누워서 힘없이 누워 있다가 그만 하늘로 가야지라고 생각하며 벼랑 끝에 홀로 서 있을 때쯤, 그녀는 불현듯 평소 엄마처럼 따르던 강부자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렇게 강부자에게 무심코 전화를 걸었더니 “알았다. 내가 언제 한번 갈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강부자가 허진을 찾아와 보니, 허진인지, 아닌지 몰라볼 정도로 차림새가 너무 초라해 정말 비참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강부자가 100만 원을 건네주었고 김수현 작가에게 “사람 하나 죽게 생겼으니 살려달라”라며 사정한 결과, 그녀는 드디어 2013년 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로 20년 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하며 다시 얼굴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습니다. 배우로서의 허진 그 이름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때를 그녀가 고백하길 “세 번 결혼하는 여자를 촬영하기 전까지는 막말로 삶에 대한 의욕이 전혀 없을 때였다. 당시 세상을 등질 정도로 절박한 심정이었는데 그때 강부자 씨를 만난 거였다.

공백기 영향이 컸던 터라, 당시 방송가에서도 나를 반기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때 강부자 씨가 소리 없는 보증인이 되어 주면서 그야말로 밑바닥에서부터 나를 건져 올려줬기 때문에 그 고마움을 항상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나도 그랬지만, 사실 멀쩡한 후배 배우들이 세상을 등지고 싶은 생각을 많이 한다. 돈 없지, 일 없지, 그러다 보면 좋은 사람도 잃지…. 그럴 때 후배들이 마지막을 많이 생각한다. 이제 내가 그 어려운 후배들에게 내가 일어선 걸 보고, 너희들도 꼭 일어나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이상한 근황

그리하여 마침내 힘든 겨울을 이겨내고 따스한 봄을 맞이한 그녀는 젊은 날의 실수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힐 뻔했지만,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 비로소 그 누구도 독불장군처럼 혼자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재기에 성공하며 일어선 듯했지만, 그러나 최근에는 조금 이상한 근황이 공개되어 다시 많은 사람의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강부자의 도움 이후 몇 년 동안 다시 일을 할 수 있었지만, 하지만 최근에 또다시 일이 없어진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도청하고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말하길 “내가 사채 쓰는 사람도 아니고, 범죄자도 아니고, 내가 남의 것을 뺏어 쓴 적도 없다. 그런데 어떤 질투 많은 여자가 자기 남편이 나를 너무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이 여자가 우리 집에 도청을 시작한 거다. 그래서 나한테 일이 들어오면 귀신처럼 알고, 나한테 오는 전화벨 소리를 안 울리게 했다. 그러니까 못 받은 전화가 너무 많다.”라며 다소 황당한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방송국 제작진들이 그녀의 황당한 주장에 대한 의심을 품고 조심스럽게 상담을 권유했지만, 이에 그녀는 자신이 최고의 연기상을 받은 사람이라며 “지금 어디 와서 깝죽거리고 있나? 그런 식으로 하려면 촬영하지 말고 나가라.”라며 분노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고백하길 “자신이 개성 있는 역할을 많이 하다 보니 조금 강하고 투박스럽지만, 사실은 실제로 정반대이다. 너무 여리고 연약하고 그래서 유순하고 선량하고 곱게 잘하려고 노력하는 그런 배우로 알아주셨으면 감사하겠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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