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뜨기 전 마지막으로” 국민 배우 엄앵란의 누구보다 파란만장했던 인생 이야기를 확인해 보세요.

여러분은 부부의 의미를 어떻게 보시나요? 사전적 의미로는 남편과 아내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으며 배필, 부처, 커플이라고도 쓰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전적인 의미 이외에는 부부는 일심동체다, 부부는 사랑이다., 원수다 등 여러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부부란 사람에 따라 행복이자, 불행이 될 수 있고 점 하나로 이 되고, 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배우 엄앵란 씨 역시 하객만 3,000명이 몰렸던 세계의 결혼식을 올리며 54년 동안 부부로 살아왔지만, 39년간 별거하고, 또한 한때 신성일이 사랑했던 여인이 세상을 떠나자 두 사람은 함께 천도재를 지냈으며, 마지막 가는 날까지 함께하지 못했던 그녀의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엄앵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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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1936년 아버지가 색소폰 연주자이고, 어머니가 배우인 예술인 집안에서 태어난 엄앵란은 의외로 어려운 성장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당시 가정을 돌보지 않은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살림을 꾸렸지만, 판자촌에서 간신히 허기를 면할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중학생이던 시절, 6·25전쟁까지 발발하자 대구로 피난을 떠난 뒤 시장에서 떡 장사를 하는 등 갖은 고생들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후 대학에 진학하고자 했지만, 당시 여유가 없었던 형편 때문에 어머니는 딸이 낙방하기를 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숙명여자대학교에 합격하면서 대학생이 되게 됩니다. 하지만 다음 학기 등록금이 걱정이던 그녀는 마침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던 영화사 사무실에 방문하면서 그녀의 인생이 180도 변하게 됩니다.

영화배우 데뷔

그녀는 영화사 사무보조 아르바이트였으나 감독은 “너 영화배우 안 해볼래?”라고 제안했고 카메라 테스트를 받으며, 마침내 1956년 영화 단종애사로 배우 엄앵란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스타가 되어 청춘 영화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여자 연예인들을 다방 마담으로 바라본 시선이 싫었던 그녀는 본인의 값어치를 올리겠다는 생각으로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대학까지 졸업합니다. 그녀는 한국 여자 연예인 중 1호 대학 졸업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신성일과의 만남

1960년 한 살 연하의 신인배우 신성일과 처음 만나게 됩니다. 하루는 촬영이 지루했던 그녀가 “미스터 신, 나 너무 졸려”라고 했더니, 한강 모래밭에 오토바이를 끌고 오는 장면에서 갑자기 신성일이 자빠지게 되었습니다.

이튿날 병문안을 갔더니 링거를 꽂고 그녀에게 윙크를 날리는데, 알고 보니 촬영이 지겹다는 그녀에게 촬영 펑크를 내서 쉬게 해주려는 잔꾀를 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후 수많은 작품에서 함께 활동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호텔 옆방에 자던 신성일이 고층 홈통을 타고 남몰래 엄앵란의 방에 들어가면서 두 남녀는 부부의 연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후 연예인 결혼 사상 가장 많은 3,000여 명의 하객들 앞에서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신성일은 총각 시절부터 숱한 여배우와 염문을 뿌리기로 아주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알면서도 결혼하게 됩니다.

시련의 결혼생활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은퇴하고 이후 10년 동안은 살림만 하게 됩니다. 하지만 후배들의 승승장구하는 모습과 집에만 있는 자기 모습을 비교하면 심각한 우울함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와도 고부갈등을 겪게 됩니다. 당시 그녀는 번 돈을 모두 친정에 두고 왔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시어머니가 사사건건 개입하자, 훗날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그 스트레스로 결국 이후부터 살이 찌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이때 시어머니가 신랑의 속옷까지 검사하고, 외출을 못 하게 하는 바람에 3년 동안 꼼짝없이 집에만 있어야 했습니다. 어느 날엔 “너희 집으로 가라고 하는 바람에 아이를 데리고 무려 6개월을 친정에서 산 적도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젊은시절 마련해 놓은 돈으로 시어머니께 집을 사들이고 나서야, 마침내 3년 만에 분가해 시집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후 바람 잘 날 없는 신성일의 바람기로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되게 됩니다.

바람 잘 날 없는 바람기

신성일의 34살 때 볼링장에서 처음 만난 여배우 김영애로, 당시 세 아이의 아빠임에도 김영애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훗날 신성일의 책에 따르면 김영애가 신성일의 아이를 가졌지만, 톱스타인 신성일에게 피해가 갈 것을 염려해 스스로 지웠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그가 고백하길 “당시 영애는 나를 이라 불렀다.

하루는 아는 영화사 사무실에서 국제전화를 받았는데 영애가 임신했다고 하더라. 순간 대답을 못 하고 있었더니 영애가 제가 알아서 할게요하고 전화를 끊더라. 그 후 1년 동안 연락 없다가 베를린 영화제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영애가 독일로 날아왔다. 내가 묵는 호텔 프론트에 메모를 남겨서 재회했다. 그녀의 그렇게 수척해진 모습을 보니까 그동안 내가 얼마나 남자답지 못했는지 알겠더라. 결국 그날 죄책감에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도록 많이 울었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2개월 동안 유럽을 휘저으며 이별여행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김영애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라는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먹던 밥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그렇게 떠날 줄 알았으면 더 잘해줄걸”하고 혼자 말을 하자, 엄앵란은 화를 내며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정계 입문과 빚더미

이후 신성일은 다른 여자 만나고, 영화제작, 극장 짓는다고 난리였습니다. 그중 제일 심각한 것은 바로 정치였습니다. 신성일은 故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정계 입문을 노렸으며, 1981년 11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지만 3위로 낙선합니다.

이후 후폭풍으로 선거 바로 다음 날 돌아온 당좌수표를 막지 못해 부도를 내자, 하루아침에 쫄딱 망해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때 신성일은 빚더미 고통으로 인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고 장소를 찾아다니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날 빚쟁이 4명이 그녀의 아파트에 몰려와 채무지불서를 쓰라며 달려들자, 당시 혼자 집에 있던 엄앵란이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제가 15층 아파트에서 하늘나라로 가겠습니다.”라고 하자, 결국 빚쟁이 중 한 분이 “갑시다. 이 사람도 시간을 줘야 돈을 벌 것 아닌가. 엄 여사는 돈 떼먹을 사람 아닙니다.”하고는 위로하며 집 밖을 나섰다고 했습니다.

시련의 연속

그녀는 생계를 위해 대구에 내려가 무려 18년간 비빔밥 장사를 하였고 1990년대가 되어서야 아침마당에서 부부문제 상담 코너의 패널로 다시 활동합니다. 남편 신성일도 마침내 3번의 도전 끝에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이 되었지만 2004년 뇌물수수를 하는 바람에 임기가 만료된 후 실형을 선고받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남편의 구속과 함께 아내인 그녀도 잠시 방송을 떠나면서 또다시 진흙탕 속에 빠지게 됩니다. 이때 많은 사람이 남편이 빨리 나올 수 있도록 1,000명의 주민이 탄원서까지 만들어 주자, 숨쉬기 힘들었던 시기를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2011년 신성일의 자서전 출간기념회에서 김영애와 나눴던 사랑 등 스스로가 과거사를 여과 없이 공개하며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자, 한동안 연예계가 그의 과거사로 들썩이곤 했습니다. 예전부터 그녀가 시사 프로에 나올 때마다 “요즘 여자들은 너무 쉽게 이혼한다. 참고 살아야지. 나라면 6번은 이혼해야 했다.”라는 발언을 수시로 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사실임이 밝혀지자, 엄앵란은 국민 보살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됩니다.

2015년에는 건강 프로그램 나는 몸신이다 촬영 중 유방암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조기에 발견돼 수술받을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40년 가까이 별거하며 지내다가 엄앵란이 아프다라고 하자, 신성일은 정성 어린 뒷바라지를 해주었고, 그동안의 행보에 대한 논란도 사그라지면서 대중들로부터 애증 어린 공감까지 얻기도 했습니다.

3개월간 집밖에도 못나오고

이와 관련해 막내 딸 강수화 씨 고백하길 “아버지는 실컷 놀다가 엄마가 유방암에 걸리니까 집에 들어오겠다는 거다. 못 들어오게 하면 서운해할 테고, 몇십 년을 떨어져 살았는데 갑자기 어떻게 살겠나? 두 분의 생활 방식이 전혀 다르다. 예를 들면 아빠는 아침 6시에 식사하고, 엄마는 12시에 아침 겸 점심을 드신다. 엄마는 젓갈류를 좋아하는데 아빠는 심심하게 건강에 좋게만 드신다.

그리고 엄마는 남자에게 관심이 없다. 오히려 남자들이 귀찮다고 하시며 아빠가 하는 스킨십도 싫어하신다. 반면 아빠는 스킨십을 아주 좋아하신다. 또한 아빠는 인터뷰에서 자꾸 애인 이야기를 하고 언론에서 말 안 해도 될 것을 굳이 말하더라. 자서전을 썼을 때도 인터뷰를 과거 이야기만 빼고 하라고 했는데, 앞뒤 다 빼고 그 인터뷰만 나간거다.

그래서 당시 엄마와 내가 3개월간 밖에도 못 나갔다. 결국 내가 엄마에게 아빠는 이미 애인도 있는데 왜 엄마는 서류상은 그냥 놔두면서 왜 이러고 사냐? 그냥 깔끔하게 이혼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엄마가 하는 말이 배우들이 몇 개월 못 살고 이혼하는 선배들을 봤기 때문에 그런 딴따라의 이미지를 깨겠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가정은 지켜야 한다라고 하셨다.

아빠는 이와 관련해 이혼하고 싶었을 때의 시기가 이미 넘었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또 하시는 말이 엄마와는 가치관이 달라서 말이 안 통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본인은 말이 통하고 생각이 통하는 사람과 연애해야겠다고 하시는데, 그때 드는 생각이 아버지도 외로웠겠구나 싶더라.”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신성일이 폐암 3기라는 판정받게 됩니다. 워낙에 건강했던지 그는 1년간 투병 생활하며 다행히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고 세상을 떠나기 2주 전,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참석하며 건재함을 보여주는 근황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남편 세상 뜨기 전 마지막으로…

그녀가 고백하길 “우리 아들이 남편 상태가 심각하다고 해서 급히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데 창밖에는 산천초목이 보이면서 그사이 희로애락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더라. 문득 나는 신성일에게 잘한 게 뭐 있나? 내가 부족하니 밖으로 돌지 않았겠나 싶더라.

그래서 그 죄를 어떻게 씻을까 하다가, 발이라도 시켜줘야겠다 싶어서 세상 뜨기 사흘 전 발을 씻겨주었는데 그게 마지막으로 본 거였다. 그리고 남편이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 아들을 귀에 대고 엄마한테 수고했고, 고마웠다고 전해줘라고 했다는데 보통 때는 주절주절 그렇게 말 많은 양반이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 남편이 가는 마지막 모습인 염할 때 보니 참 곱고 깨끗하더라.

그런데 장의사가 분을 발라주는데 화장 솔이 너무 시커멓더라. 이 송장, 저 송장 얼마나 발랐으면 저리 시커메졌을까? 톱스타 신성일 가는데 알았으면 새 옷을 사줬을 텐데…. 마음이 내내 아프더라. 사람들은 나이 들어 왜 눈물을 안 흘리냐고 하는데 일부러 안 흘리는 거다. 내 가슴 한가득 눈물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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