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식구가 라면 하나로 끼니를…” 국민 가수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국민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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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가 되겠다는 꿈

아버지를 닮아 어릴 적부터 노래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고교 시절 콩쿠르대회에도 여러 번 나가 상품도 많이 탔고 대천극장 무대 쇼에 올라가 당시 유행곡인 진송남의 바보처럼 울었다를 불러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으며 고향 대천 일대가 들썩거릴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가 대학 시험에 떨어진 후 공부를 완전히 접고 본격적으로 가수가 되기로 마음먹었고 아는 형과 함께 서울의 아카데미 음악감상실에서 개최하는 노래 경연에 참여해 서울 사람들을 모두 이겼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는 서울 사람들 노래 실력 별거 없네라고 생각하며 노래에 대한 자신감이 더욱 생겼고 진짜 가수가 되어야겠다는 꿈도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충청도 청년 김국환은 가수가 되겠다는 꿈 하나만 가진 채,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레코드 회사에서 허드렛 일했다고 했습니다.

김희갑 악단의 활동

그러던 중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레코드 회사 사장의 추천으로 작곡가 김희갑의 오디션을 보게 되는데, 당시 김희갑은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 등을 작곡한 사람으로서 김희갑의 악단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은 곧 가수로서 성공을 의미할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21살의 김국환은 김희갑 앞에서 딜라일라라는 노래로 오디션을 봤는데 당시 김희갑이 김국환의 노래를 듣고 별다른 표정은 없었지만, 그냥 합격시켰다고 했습니다. 사실 당시 김국환이 오디션을 볼 때 김희갑의 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무대를 보고 “저 친구 노래는 잘하는데 키가 작고 심지어 얼굴도 못생겨서 안 된다.”라고 했지만 정작 김희갑은 “돼지 인물 보고 잡아먹나? 가수는 노래만 잘하면 된다.”라며 그들의 입을 막아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김희갑이 “내일부터 나오라.”라고 해서 김희갑의 악단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앞서 얘기했던 김희갑 악단이 당시 실력과 명성에서 최고였고 그 당시에 나이트클럽에서 김희갑 악단이 대한민국 최고의 개런티를 받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때를 김국환이 고백하기 “그 당시 한국은행 부장 월급이 30만 원이었다면 21살인 내가 더 받았다.

김희갑 악단에 있을 때는 진짜 부러운 게 없었다.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면서 살았다.”라고 했습니다. 한편, 이때 연배인 가수 조영남이 그에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그에게 말하길 “국환아, 너 노래하는 거 진짜 말리고 싶다. 노래한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라고 했으며 이 말을 들은 김국환 그의 데뷔 초 실제 목표는 당시 이름을 날렸던 조영남을 능가하는 가수가 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홀로 힘든 현실을 부딫히며…

한편 김국환 그가 김희갑 악단에 소속되어 밤무대 등에서는 많은 돈을 벌었지만 말 그대로 악단의 메인 보컬이었지 다른 가수들처럼 본인의 이름을 건 솔로 앨범은 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도 이제는 솔로 앨범도 내고 TV에도 나오고 싶다는 욕심에 결국 악단을 나와, 솔로 앨범 잊어야 할 그 사람을 내놨지만, 대중은 그를 외면했고 이때부터 타타타가 나오기 전까지 엄청난 기나긴 무명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악단에서 하던 밤무대 없어도 홀로 선 그로서는 구하기 어려웠고 악단에 있을 때는 가만히 있어도 돈이 생기는데, 나오니까 스스로 직장을 구해야 했으며 본인은 시골 촌놈인데 서울에 아는 사람도 없고 학연도 없어 그게 가장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무명생활과 가난

가수 김국환, 그가 무명 시절에 돈이 없어서 어느 날 끼니를 네 가족이 라면 한 개를 나눠서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너무 배가 고팠는지 누나의 라면까지 빼앗아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누나가 동생의 머리를 쳤고 동생이 그대로 뒤로 넘어가 켁켁거리자 목에 걸린 라면을 빼려고 잡아당기다 보니까 라면이 줄줄 계속 나왔고 그걸 본 김국환은 애가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씹지도 않고 삼키려고 했을까?라며 울분을 토했습니다. 그렇게 돈 없던 무명 시절에 설움을 겪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만화 주제가를 부르게 된 이유

그렇게 힘든 무명 시절을 보내고 있던 그에게 어느 날은 방송사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왔다고 했습니다. 노래 좀 불러달라라는 전화였고 그래서 그가 어떤 노래냐?라고 묻자, 만화 연속극의 주제가였다고 했습니다. 사실 당시 성인 가수인 그로서는 어린아이들의 만화영화 주제가의 제안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자녀들에게 아빠도 가수야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그는 결국 은하철도 999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녹음실에 가서 불러줬는데 그 이튿날 바로 TV에 그의 목소리가 나왔고 당시 그는 어제 부른 노래가 벌써 나오나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우연히 은하철도 999를 부르게 되었지만 얼마 못 가서 성인 가수인 자신이 왜 이런 어린이들의 만화영화 주제가를 불렀는지?라는 후회가 되고 창피해서 방송국에 전화해 만화가 끝날 때 나오는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지워달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훗날 그가 이때를 고백하기 “남들은 이름 넣어달라고 난리를 피웠을 텐데, 난 창피해서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빼달라고 했다. 방송국에서 아마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때 나는 참 소견이 좁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후회된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물론 당장 먹고살기 힘들었던 그는 은하철도 99로 시작해 그 이후로 30개의 만화 영화 주제곡을 부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 그의 노래가 울려퍼져

그가 가수로 데뷔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별다른 성과도 없이 가난하던 그때 당시 평균 시청률 60% 가까이 기록했던 국민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한창 방영 중이었는데 그 드라마의 작가 김수현이 어느 날 차를 타고 라디오를 듣다가 김국환의 타타타를 듣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름 모르는 무명 가수의 노래가 마음에 들었던 김수현은 기사에게 “이 노래 음반 좀 사 오라.”라고 했고 근데 기사가 엉뚱하게도 잘못 알고는 이진관의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앨범을 사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보내 결국 타타타를 사 왔으며 노래가 자신의 마음에 쏙 든 김수현은 사랑이 뭐길래 PD한테 이 노래를 드라마에 넣어달라고 합니다. 대중가요라서 편파적이고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며 처음에는 거절당했지만 근데 김수현 작가가 끈질기게 넣어달라고 요청한 끝에 결국 드라마에 삽입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시청률 60%를 기록하던 국민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김혜자가 “니들 이 노래 들어볼래? 내가 방송에서 우연히 들어봤는데 말이야. 어쩜 내 심정이랑 똑같겠니?”라며 김국환의 타타타의 한 소절을 듣는 장면이 나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자신의 노래가 TV 속 드라마에서 흘러나오자, 이를 본 김국환은 어리둥절하며 놀랐고 혹시나 다음 편에도 또 내 노래가 나올까 싶어 드라마가 방영될 시간에 TV 앞에 뚫어지게 앉아 있자, 당시 그의 아내가 “이제는 안 나오니까 그만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거짓말처럼 또 타타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모두가 시청하는 국민 드라마에 타타타가 두 번이나 흘러나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부터 전화가 오기 시작하는데 말도 못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1969년에 데뷔해 제대로 된 앨범 한 장 못 낸 그가 20년 만에 낸 1집 데뷔 앨범 타타타가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자, 1992년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 신승훈 그리고 김국환이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노래 ‘타타타’, ‘접시를 깨뜨리자’

타타타가 공전의 히트를 하면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김희갑 악단에서 나와 무려 15년 동안 무명 시절을 보내다가, 결국 김희갑과 다시 재회했고 사실 이 곡도 원래 조용필이 부를 계획이었지만 마지막 부분의 웃음 파트와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용필의 분위기와 맞지 않아서 이 노래를 부를 다른 가수를 찾다가 결국 김국환에게 넘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이 곡이 김국환의 인생을 바꿀 만큼 엄청난 대박을 터트리게 되었고 그의 이름도 널리 알려졌다고 했습니다. 후속곡 우리도 접시를 깨뜨리자 역시도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지금이야 남편들이 주방에서 밥을 하고 설거지도 하지만 20년 전에는 남성들이 주방 출입을 꺼리던 때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가사 일을 돕자는 노랫말이 주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지만, 당시 남자들은 왜 쓸데없는 노래를 만들어서 마누라한테 바가지 긁히게 만드냐?라는 질타도 받았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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