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세 가수 김추자 안타까운 근황 이수미 별세하자마자 결국… ” 어떤 상황인지 확인해 보세요.

1970년대 인기 트로이카로 유명했던 이수미, 김추자, 정미조 님을 많은 분이 알고 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은 김추자 씨를 추억해보면 그녀의 파란만장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최근 김추자 씨의 안타까운 근황도 함께 알려드리겠습니다.

김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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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재다능한 어린 시절

김추자 씨는 1951년 1월 2일생으로 70대가 되었습니다. 강원도 춘천시 효자동에서 아버지 김창홍과 어머니 박어진 사이에서 딸만 다섯인 딸 부잣집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조부 김덕원 선생님은 강원도 홍천에서 기미독립운동을 모의, 조직해서 1919년 4월 3일 거사한 장부입니다. 강원도 내에서 최대 규모인 3,000명을 집결시킨 분이셨습니다.

김추자 씨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 무용, 운동 등 다방면에서 탁월한 재주를 드러냈습니다. 아버지는 공부와 늦은 귀가에는 엄했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남다른 애정을 갖고 지원했습니다. 김추자 씨는 학창시절 춘천문화방송 합창단에서 활동했고 무용학원, 노래학원 등을 다니며 끼를 연마했습니다. 그리고 운동 또한 잘해 강원도 대표 배드민턴 선수와 기계체조 선수로도 활약했습니다. 당시는 김추자 씨는 고등학생 때 응원단장으로도 활동했었으니 대단한 인기였으며 두드러진 외모나 활동으로 춘천 남학생들의 관심이 초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김추자 씨의 노래 재능은 천부적이었습니다. 배워본 적 없는 판소리나 창까지 듣고 그대로 따라부를 만큼 재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등학생 시절 수심가 판소리를 불러 상을 받았습니다. 그림도 좋아하여 미대에 갈 생각으로 미술을 준비해서 대학 시험을 쳤습니다. 그러나 실기는 합격했는데 필기에서 떨어져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로 진학했습니다. 본인 말로는 그래도 예술 분야라 연극영화과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데뷔 이후 활동

어쨌든 그렇게 대학에 입학했는데 입학하자마자 가수로 데뷔하게 됩니다. 그 당시 가수가 되려면 가수의 문화생이 돼야만 했는데 신중현 매니저와 김추자 형부가 친한 사이여서 김추자의 노래실력을 알게 된 형부가 다리를 놔줍니다. 김추자 씨는 신중현 사무실에 찾아갔는데 신중현이 바빠서 몇날 며칠을 하루종일 마냥 기다렸다고 합니다.

며칠 후 김추자의 노래를 들어보고는 처음에는 별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더니 며칠 후 곡을 툭 던져주었는데 그 곡이 데뷔곡 ‘늦기전에’라는 곡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969년에 데뷔곡 ‘늦기전에’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를 포함한 1집을 발표했습니다. 그 당시 1969년은 베트남전 파병문제로 민심이 흉흉하고 반전 히피문화가 전 세계를 풍미하던 시절이라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그런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1970년 님은 먼 곳에, 1971년 거짓말이야 등의 곡이 연속 완전히 히트했습니다. 이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는 현재 LG 트윈스의 응원가로도 쓰이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행하던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농담이 있었을 정도로 60~70년대를 풍미했던 한국의 소울 가수였습니다.


노래, 춤, 패션, 김추자 씨는 정말 수십 년 앞선 가수였습니다. 패션까지 큰 화제가 되었으며 일단 노래 스타일이 기존 가수들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남진, 나훈아, 이미자 등의 창법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김추자 씨의 패션은 그 당시 최첨단 패피들의 추종의 대상이었습니다. 지금 봐도 대단히 앞서간 패션으로 이탈리아 컬렉션에서 금방 나온 디자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김추자 씨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이 있었고 불의의 고개를 숙이지 않는 저항정신이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수난의 시작

그런 성격이기에 엄청난 수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었는데 연예인들은 청와대의 부름에 거절하기가 어려워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청와대 비서실에서 김추자 씨에게도 그런 제의가 왔는데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김추자 간첩설이 제기됩니다. 1971년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김추자 씨가 손짓하는데, 그것이 바로 북한과의 교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며 실제로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충격적인 소주병 테러사건

가장 어마어마했던 사건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1971년 당시 김추자 씨 매니저는 해병대 출신이며 국가대표 레슬링 대표 선수를 지냈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연예계에는 주먹을 휘두르는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어서 그런 사람들을 막을 만한 체력이 필요했기에 보디가드 겸 매니저로 기용했는데 매니저와 김추자 씨의 갈등이 생겼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 도중 매니저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주병을 깨서 그것으로 김추자 씨의 얼굴을 공격했습니다. 나중에 매니저는 김추자 씨랑 결혼하려고 했던 사이라는 소리를 했으나 김추자 씨는 부인했습니다. 어쨌든 김추자 씨는 얼굴에 무시무시한 부상을 당했고 이 사건으로 무려 100바늘을 꿰매야 했고 6번의 성형 수술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사고가 난 지 4일밖에 안 되었는데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고서 약속했던 공연장에 나와 무대에 섰습니다. 물론 노래는 못했지만,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려는 그녀의 행동에 큰 감동을 하였습니다. 이런 행동을 보면 김추자 씨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마초 사건

그 후 한동안 무척 힘든 나날을 보내다 1974년 무인도라는 노래에 재기에 성공합니다. 그런데 아직 실현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김추자 씨는 일반담배조차 전혀 못 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자 밴드멤버 중에 한 사람이 대마초를 피우면 목소리가 잘 나온다고 적극적으로 권해서 한 모금 피워보았습니다.

그러나 기침만 나오고 사례가 걸려 더 이상 피울 수가 없자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나중에 수색 과정에 그때 버렸던 대마초가 나오자 증거라며 그 유명한 1975년 연예인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가수 활동을 중단당해야만 했습니다. 어마어마한 이슈가 된 가수이지만 그 생명이 너무 짧고 굵게 끝나고 만 것입니다. 5년 정도 화려하게 활동하고 억울하게 가수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결혼생활

이후 1981년 미국 네브라스카주에 있는 대학교에서 유학하고 있던 현재의 남편을 만났는데 그 당시 남편은 김추자 씨가 가수라는 것도 몰랐다고 합니다. 서로의 진지함과 화끈함에 반해 그 해 비밀리에 약혼하고 명동성당에서 양측 가족들과 작곡가 신중현, 가수 박상규가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연예계를 떠나게 됩니다. 그동안 철저하게 주부로 살아왔습니다. 된장, 고추장 담그는 데 명수고 젓갈도 잘 알고 김치도 잘 담근다고 합니다. 빨래도 삶고 방망이질해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합니다. 게다가 시어머니까지 모셨고 나중에는 친어머니까지 함께 모셨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남편이 열린 사람이었으며 남편이 노래를 못하게 한 게 아니라, 김추자 씨가 원래 두 가지를 못하는 성격이라 본인이 스스로 가정에 올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서울대까지 다닐 정도로 잘 키운 딸이 아직 늦지 않았다며 어머니에게 가수 컴백에 대해 용기를 주고 격려해주어 드디어 다시 무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근황

김추자 씨는 63세가 된 지난 2014년 33년 만에 컴백을 발표하며 콘서트를 개최했고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19년 고향인 춘천 인근에서 남편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어 주변 지인들이 많이 걱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고시절 가수 이수미 님이 2021년 9월 2일 향년 69세로 별세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알려진 김추자 씨의 건강 악화설이 상당히 걱정되었습니다. 부디 완쾌하셔서 다시 한번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시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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