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조연 배우 폐암 투병 중 결국 “폐에서 시작된 암이 척추와 뇌까지…” 안타까운 그의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2020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 암 사망률 1위는 폐암이라고 합니다. 폐암은 초기 증상이 거의 없어서 발견 시 이미 상당히 진행된 경우가 많고, 재발과 전이가 빈번하게 일어나 사망률이 높은 암 중 하나입니다. 폐암 환자의 95%가 직접 흡연하는 애연가라고 합니다.폐암 증상은 호흡 곤란과 기침, 가래, 두통, 구토 등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감기 증상과도 비슷하므로 조기에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껏 많은 연예인이 폐암 투병 소식을 전한 이후 비보까지 연이어 들려줬습니다. 전설적인 코미디언 이주일은 하루에 담배를 2갑씩 피우다가 2002년 향년 61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03년에는 탤런트 이미경이 투병 중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 많은 이들을 슬픔에 빠뜨렸습니다.

2008년 12월에는 배우 박광정이 폐암으로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박광정은 투병 중에도 연극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고 끝까지 투신했습니다. 담배를 끊었음에도 폐암이 악화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9개월간의 투병 생활을 끝마치고 향년 46세라는 젊은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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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와 연출의 꿈을 꾸며

1962년 전라남도 광산군에서 출생한 박광정은 광주 진흥고등학교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했습니다. 사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연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고등학교 졸업 후 성균관대학교 공과대학에 진학했다가 우연한 기회의 연기의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연극반 활동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뭔가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고 결국 군 복무 이후 다시 입시를 준비하여 한양대 연극영화과로 재입학했습니다. 명문대를 과감히 그만두고 연극영화과에서 그는 전문적으로 연출과 연기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활발한 활동

그 후 1992년 영화 명작 아끼꼬 소냐로 연기를 시작으로 같은 해에는 연극 마술 가게로 연출가 데뷔까지 마쳤습니다. 박광정은 이후 탄탄한 연기로 드라마, 영화 등에 자주 출연하며 대중에게 그의 존재를 각인시켰습니다. 특히 복잡한 감정선을 자연스럽게 표현해야 하는 감초 조연을 자주 등장했습니다. 그의 명품 연기가 빛을 발한 것은 97년 영화 넘버3에서 랭보역을 맡으면서였습니다. 주연은 아니지만, 작품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아 관객들에게 그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켰습니다.

그 이후 박광정은 영화 행복한 장의사, 오로라 공주, 드라마 마법의 성, 맛있는 청혼, 좋은 사람, 내 사랑 팥쥐 등에 출연하며 대중에게 다가갔습니다. 다양한 작품에서 매번 걸맞은 옷을 입던 그는 2007년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를 통해 연기 인생 최초로 국제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대박 인생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으며 배우 인생 2막을 열었습니다. 그가 데뷔한 지 10여 년 만에 첫 주연을 맡는다며 주변에서는 당사자보다 더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연이나, 조연이나, 그냥 선호하는 역을 맡아서 잘할 수 있는 연기를 하는 것뿐입니다.”라며 무덤덤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첫 주연에 대해 기쁨을 만끽하기보다 다음번 연극에 대한 고뇌에 빠져 있었습니다. 연기에 대한 그의 열정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고, 이제는 주연 배우까지 맡았으니 그야말로 그의 연기 인생은 탄탄대로가 예상되었습니다.

폐암 판정에도 연기에 대한 열정

하지만 기쁜 소식도 잠시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사실이 닥쳐왔습니다. 그는 평소 잦은 두통을 앓아왔습니다. 그는 그것이 연극에 대한 깊은 고찰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두통은 좀처럼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점차 증세가 심해져만 갔습니다. 이에 그는 병원을 찾았다가 폐암이라는 선고받았습니다.

비록 폐암을 진단받은 후 끊기 힘들다던 담배를 단번에 끊었지만, 병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음 폐암 소식을 접한 뒤에도 연기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그는 폐암 판정을 받은 이후에도 자신이 연출한 작품을 연극 무대에 올리며 연극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서울 노트를 끝으로 그는 연극계를 떠났습니다. 박광정은 꾸준한 치료에도 12월부터 병세가 급속도로 나빠졌습니다.

그 무렵 그와 통화를 했다고 밝힌 한 기자는 ‘그의 목소리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분했다’라고 기억했습니다. 건강에 대한 안부를 묻는 말에도 특별한 이상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빼먹지 않고 꾸준히 치료받고 있으니 서서히 좋아지지 않을까요?”라며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고 합니다. 박광정은 마지막까지 ‘새해가 되면 조만간 한 번 뵙자’라는 인사를 하며 그의 고통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의 애도

유족에 따르면 “박광정은 주위 사람들이 걱정할까 봐 걱정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아플 때도 있는 거다. 건강한 모습으로 무대에 서야 한다.”라고 마지막까지 걱정하는 주변 사람을 더 걱정하고 병마 극복 의지를 보이며 다시 연극 무대에 오르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박광정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빈소는 유독 많은 연예계 인사들이 찾아와 애도를 표했습니다. 문성근은 “조그마한 아파트를 장만한 후 얼마 있다가 다시 전세로 갔는데 그 이유가 극단 운영비 충당을 위해서였어요. 극단을 운영하면서 1년에 7천만 원 정도 쓴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어느 날 연습하다 기침 나고 아프다고 병원 갔더니 이미 너무 퍼져 있는 상태였어요.”라며 고인의 생전 모습을 회상했습니다.

조재현은 “뒷덜미를 자꾸 만지면서 뒷목이 뻣뻣하다라는 말을 많이 해 병원에 가보라고 했더니 무서워서 못 가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너무 번진 상태였다.”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는 박광정이 2001년 극단 파크를 열며 연극에 대한 열정을 더욱 키워나갔던 것도 건강에 안 좋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극단을 운영해 나가면서 책임감과 중압감이 엄청났을 거예요. 공연하면 할수록 적자인데 대표가 유명 배우라는 이유로 연극계로 지원되는 지원금도 받지 못해 빚을 내가며 힘들게 경영했습니다. 그래도 그 형은 연극이 좋아서 늘 연극 얘기만 했습니다.”라며 안타까움을 전했습니다.


제작사에 따르면 박광정은 일본 프로모션 당시 담이 심하게 와서 괴로워했고 그때 몸에 이상이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폐에서 시작된 암은 척추와 뇌까지 전이됐으며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수술할 단계가 지나 방사선 치료만 가능하다.라는 통보받았다고 하더군요.”라며 착잡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정석용은 “얼마 전 중환자실에 들어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곧 다시 나오셨어요. 돌아가시기 이틀 전 중환자실을 가셨을 때도 며칠 전처럼 또 회복해서 나오시겠지 했는데….”라며 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평소 고인과 가깝다고 알려진 권해효는 광정이 형님을 부르짖으며 오열했고 정원중과 이대영은 내내 말이 없었습니다. 그의 장례는 고인의 뜻에 따라 차분하게 진행됐습니다. 14살 나이의 아버지 영정을 품에 하는 큰아들은 슬픔 속에서도 상주로서 의젓한 모습을 보여 지켜보는 사람들을 더욱 가슴 아프게 했습니다. 박광정을 똑 닮은 12살 둘째 아들은 고인이 화장되는 것을 지켜보며 쉴 새 없이 서러운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아버지를 여읜 어린 두 아들의 모습에 많은 이들은 모두 제 일처럼 슬픔을 느꼈습니다.

마지막으로

병을 떨쳐내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길 바랐던 많은 이들의 바람을 뒤로 하고 박광정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갔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연극에 대한 애정을 보였기에 그의 비보는 연극계를 큰 슬픔에 빠뜨렸습니다.

화장터로 향하기 전 고인은 평생 헌신했던 대학로를 찾아 소극장들을 순회하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눴습니다. 평생을 연극에 헌신한 그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있는 그곳에는 고통 없이 행복만 가득하길 바라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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