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간 간병한 남편 하늘로 보내고 “치매로 사람도 못 알아보는 여배우” 그녀의 안타까운 상황을 확인해 보세요.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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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어머니의 가르침

전원주는 1939년에 개성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전원주는 집에서 인삼 농사를 크게 해서 어머니께서 인삼 뿌리 다듬는 일을 자주 시키셨다고 합니다. 인삼 뿌리를 잘 다듬으면 그날그날 일당을 주셨는데 많은 양을 잘 다듬은 날은 일당을 더 주셨고 대충 다듬은 날은 일당을 조금 주셨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전원주는 열심히 일하면 좋은 대가가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6.25가 터지며 보따리 하나만 들고 피난을 오게 된 전원주와 가족들은 그때부터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의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노점에서 도넛과 떡을 만들어 팔았는데 전원주에게도 매일 나무 쟁반에 도넛을 담아 팔게 했습니다. 할당량을 다 팔아야 집에 올 수 있었으며 팔고 나면 어머니는 용돈을 주셨다고 합니다.


밑천을 마련해 비단 가게를 열게 된 어머니는 가게에 나갈 때마다 떡을 해서 매장에 놓고 손님들에게 드렸는데 맛있는 떡을 먹은 손님들은 빈손으로 나가지 않고 비단을 사가고, 그렇게 열심히 일한 어머니는 나중에는 형제들에게 집과 땅을 사서 나누어 줄 정도로 많은 돈을 벌게 됩니다.

그렇게 전원주의 어머니는 장사 재주가 뛰어난 여장부셨던 것입니다. 또한 어머니는 마당 넓은 주택에 사시면서 큰 가마솥에 밥과 국을 만들어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을 나누어 주기도 하셨고 훗날 전원주가 단역 배우를 전전할 때, 어머니는 촬영장에 밥을 이고 지고 와서 밥을 먹이시기도 하셨습니다.

결국 연기자로 데뷔하지만…

어머니의 권유로 중학교 담임 생활했으나 자신과 적성에 맞지 않는다라는 생각한 전원주는 급기야 학교를 그만두고 맙니다. 그리고 전원주는 목소리가 예뻐서 성우로 데뷔하였으며. TV 없던 당시 시절에 해설과 연기를 하며 전성기를 보내게 됩니다. 당시 영화의 주인공 여배우 목소리도 많이 맡을 정도였지만, 그런 딸이 연예인을 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팔자 센 여자들이나 연예인을 한다라며 반대하셨고, 전신 거울을 보여주며 “네 낯짝을 봐라! 네가 연예인 얼굴이냐? 자기 자신을 알아야지. 그래서 내가 선생을 만든건데 팔자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느냐?”라며 심하게 반대하셨습니다.

게다가 TV 방송이 개국하며 라디오에서 브라운관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지만, 전원주가 얼굴이 따라주지 않으니 밑바닥 역할만 맡게 되자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 보기 매우 창피해하시게 됩니다. 늘 앞치마를 두르거나 아기를 들쳐 업고 가정부, 무속인, 사극의 주모 역할만 맡게 되니, 어머니는 단역을 전전하는 모습에 속이 많이 타게 됩니다. 이후로도 전원주의 무명생활은 무려 30년이나 지속됩니다. 당시 여배우들 사이에도 시샘이 많아 늘 무시당하기 일쑤였고 너무 서러워 화장실에서 울기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순탄치않은 결혼과 재혼

어머니는 전원주에게 좋은 자리에 시집을 보내려고 알아본 끝에, 당시 의사 집안에 잘생긴 훈남에게 시집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 불행이 닥치게 됩니다. 어느 날 남편이 피를 토하자, 알고 보니 폐결핵 환자였고, 그렇게 전원주는 결혼한 지 3년도 안 되어 남편을 하늘로 보내며 과부가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원망하는 딸에게 어머니는 “엄마가 잘못했다. 평생 엄마가 너의 인생을 책임지마.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아기 키우고 살면 된다. 엄마가 모든 지원을 해주겠다.”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남은 평생을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살기가 무서웠던 전원주는 결국 친구 돌잔치에서 경상도 사나이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재혼하기 위해 어머니께 소개를 해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첫인사 자리에 백구두와 빨간 넥타이, 머릿기름을 바르고 제비처럼 등장한 바람에 어머니는 남자를 보자마자 나가버리시며 전원주에게 “자기랑 살든지, 그 남자랑 나가든지 선택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전원주는 그 남자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결국 남자와 나가게 되었고, 그 남자 역시 전원주처럼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렇게 전원주는 두 아들을 키우며 남편과 5만 원짜리 사글세 단칸방에서 겨울에 난방도 못 했고, 연탄 땔 돈도 없어 길에서 타다만 연탄을 주워다 떼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어머니가 집으로 찾아왔는데 한겨울에 차디찬 집에서 떨어진 스웨터를 입고 있던 딸을 보며 어머니는 바닥을 치며 대성통곡하게 됩니다. 게다가 전원주는 새 남편과 부부 금실은 좋았지만, 무려 6번의 유산을 감당하면서까지 아이는 더 낳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후 당시를 회상하며 “자궁을 몇 번이나 긁어내니 나중에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도 못했다. 일어나 보니 친정엄마가 정화수 떠 놓고 빌고 있더라. 지금 사람들은 이해 못 할 것이다. 나 또한 정말 부끄럽다.”라며 첨단 시설이 부족하던 시대에 무리한 시술로 목숨을 위협받던 당시 상황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성형수술을 고민하며

게다가 그녀는 이후 입 큰 여자가 너무 많이 웃는다고 괴롭고 혐오감을 준다라는 황당한 이유로 40일간 방송정지까지 당하게 됩니다. 전원주는 방송국 윗선에서 “내가 너무 시끄러웠는지 연출들이 드라마에 들어가기만 하면 무조건 나를 죽였다”라고 했으며 “그럴 때는 어떤 사람의 말도 위로가 안 되고 자제력이 사라진다.”라며 속상하고 애통한 심정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연기 생활 50년 중 30년 동안 가정부 역할만 한 그녀는 “주인공은 조금만 말해도 나보다 돈도 더 많이 받는다. 그러나 나는 밥상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녔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애까지 업고 뛰어다녔다.”라고 했고, 왜 나는 안 풀리고 힘든 길만 가나?라는 생각에 보기 싫은 큰 입을 성형수술 할까도 고민하던 전원주는 인왕산에 갔다가 결국 점집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점쟁이는 전원주를 보자, 입에 복이 많다.라며 `지금은 힘들어도 노년에는 입에서 확 받쳐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노년이 좋아진다.”라고 하였습니다.

웃음 소리

전원주는 그 말을 듣고 결국 성형수술을 포기하고 이후 혼자 괴로움에 길을 걷던 중 시장에서 깔깔깔 웃는 아줌마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웃음을 듣고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아, 바로 저거구나!하며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후 그녀는 집에서 매일 거울을 보며 웃음을 연습했고 아이들이 “엄마! 그만 좀 웃어요. 무서워! 귀신 나올 것 같아.”라고 할 정도였으며 남편마저도 “당신 미쳤냐?”라며 화를 내는 바람에 전원주는 밖으로 나와 길거리에서 웃음을 연습하게 됩니다.

전원주는 자신의 매력을 보이기 위해 방송국 연출자 앞에서도 캐릭터 맞는 역할이 있으면 섭외해달라는 의미로 우습지도 않으면서 맨날 깔깔깔 웃는 얼굴을 보이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간절한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요? ‘웃는 사람 얼굴에는 침 못 뱉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때부터 전원주의 인생에는 행운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그 웃음으로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하성댁으로 캐스팅이 된 전원주는 많은 사랑을 받았던 국민 드라마에 이후 장장 7년 8개월이나 출연하며 드디어 인기 배우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그녀는 너무 기쁜 나머지 매일 논밭에서 일하는 연기를 땡볕에 하루 종일 해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드라마 이후 시골에 가면 사람들이 하성택 전원주를 알아보게 되었고 게다가 몇 년 후 인생을 바꾼 cf 한 편이 온 국민을 흔들어 놓기까지 하게 됩니다.

아끼고 절약하는 삶

이후 배우로서 전성기를 달리기 시작하며 큰 돈을 벌기 시작하였지만 수십 년간 힘든 인생을 살아온 그녀는 1원 한 푼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습니다. 버는 돈은 모두 다 저축했고 신발이 탈색되거나 망가지면 꼭 고쳐 신었습니다. 화장품은 샘플을 활용했고 옷은 협찬받거나 할인해서 샀는데 “20년 된 옷도 어차피 유행은 돌고 돌아 복고풍이 유행하는 것 아니냐?”라며 곰팡이를 털고 고쳐서 입었습니다.

또 빈그릇운동본부 홍보대사를 맡아 밥이나 음식도 남편하고 먹을 만큼만 준비해 일절 버리는 법이 없었고, 수십 년 전 시집올 때 쓰던 물건도 아직까지 쓰는 게 많은 정도로 웬만한 물건은 버리지도 않고 재활용해서 쓰레기도 별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또한 콩을 삶은 물을 버리지 않고 마셨고 밥 지을 때도 넣고 시간은 돈이라는 생각의 핸드폰도 꼭 필요한 말만 하고 딱 끊었습니다. 그렇게 전원주는 나중에는 은행에 가면 번호표를 뽑을 필요가 없는 호사까지 누리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녀가 은행 예금액으로 VIP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웬만한 거리는 뛰어다니고 하루에 바쁜 스케줄에도 매니저 없이 활동했는데 그녀는 지방 스케줄에도 정확한 시간에 도착할 수 있다며 자가용이 아닌 무궁화호 기차를 애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예인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투박하지만 이런 그이기에
손이 고운 처녀들을 보면 일단 며느릿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한답니다.

전원주는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는 오히려 잘 베푼다고 합니다. 어릴 적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을 지어 나누어 주시던 어머니를 보고 자란 전원주는 사랑 나눔 전국 네트워크와 노인 의료 나눔 재단 등 수도 없이 많은 기관에 홍보대사로 임명되며 공익 활동에 참여했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지자체에서 그녀를 홍보대사로 서로 모셔가기 바빴습니다.

어머니와 남편을 하늘로 보내고 찾아온 치매 증상

하지만 건강했던 그녀도 어느 순간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작은 키를 커버하기 위해 굽 높은 구두를 자주 신었더니, 어느 날 지하철을 탔는데 허리가 아프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면서 주저앉게 됩니다. 병원에 갔더니 척추 협착증이라는 진단받게 된 전원주는 이후 맹장에도 문제가 생기며 맹장 수술까지도 받았고 급기야 몇 년 전 남편을 하늘로 보내고 우울증과 건망증에 시름 하게 되며 “기억력도 떨어지고 사람도 못 알아보겠다.”라며 “치매 증상이 오는 것 같다.”라고도 털어놨습니다.

전원주의 남편은 간암으로 10여 년을 병상에서 투병하며 16번이나 수술을 한 끝에 그만 하늘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바쁘게 일하러 다니느라 남편의 임종도 보지 못했다.”라는 전원주는 남편에게 “이제 편안한 세상에서 있어라. 곧 따라가겠다. 많이 밉기도 했는데 지금은 미운 감정도 하나도 없다. 당신이 정말 보고 싶다.”라며 남편과 하늘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전원주는 과거 어머니도 중풍으로 쓰러져 13년이나 병상에 누워 있다가, 딸이 유명해진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바람에 평생의 큰 하늘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속 썩였던 어머니께 효도하고 싶었지만, 부모는 자식이 효도할 때를 기다려주지 않더니, 이제 평생 남편마저도 떠나고 결국 자식마저도 이런저런 병에 시달리며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는 전원주. 어느덧 구순을 향해가는 그녀가 부디 오래도록 건강을 잃지 않기를 바라며 너무나 힘든 인생을 살아온 전원주에게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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