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여가수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충격 재산 수준” 갑자기 은퇴하게 된 이야기도 들어 보세요.

최고의 여가수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는 가수 패티김이 과거 한 인터뷰에서 고백하길 “사람들이 나의 이미지를 보고 이것저것 잘 따지고, 잘 챙겨서 꽤나 부자일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사실 나는 가난한 유명 인사다. 내가 가난하다고 하면 누가 믿겠냐마는 가수는 행사를 많이 뛰고 뻔질나게 다녀야 돈을 만지는데, 나는 그렇지 못해서 수입이 뻔하다. 지금이 아니라 옛날부터 그랬다.

가수의 주 수입원은 야간업소 출연인데, 나의 전성기 시절에도 밤무대의 환경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유혹도 많았지만, 그런데도 나하고는 궁합이 맞지 않더라. 한 번은 끈질긴 섭외에 무교동 업소에 3번가량 출연했었는데, 안 하던 걸 하려니 어색해서 곧 그만두었다.

이처럼 나는 돌이켜 보면 아무리 인기가 있었어도 돈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렇게까지 얘기를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참으로 오해도 많고 불이익도 많이 받았던 사람이다.”

“내가 뭘 해도 사람들의 시선은 다르더라.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뭐냐면 패티 김은 미국에 살다가 돈 떨어지면 한국에 와서 공연한다라는 말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낭설이다. 오죽 화가 났으면 한때는 한국도, 미국도 아닌 일본으로 귀화할 생각까지 했다.”라는 패티김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더불어 한때 쫄딱 망해 더 이상 망할 게 없어서, 집에 5개월이나 갇혀 살아야 했던 가슴 아픈 인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여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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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난 패티김은 본명이 김혜자로, 그 어렵던 시절 어머니가 숙명 여전 출신의 신여성이었고, 아버지는 일본 메이지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나름대로 뼈대 있는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또한 그녀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신문사와 광산을 운영하면서 돈을 많이 벌어 집안이 상당히 부유했지만, 6.25 전쟁이 일어난 후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그야말로 집안이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어릴 때부터 잘 울지도 않고 아이들과 다투면 꼭 이겨야 직성이 풀렸던 그녀는 중2 때부터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덕분에 전국 중고교 국악대 창 부문에서 1등을 할 만큼 재능도 있었지만, 당시 창 배우면 기생된다는 집안의 반대로 더 이상은 음악을 할 수 없었습니다.

쉽지 않았던 가수 데뷔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아나운서 시험에도 응시했지만, 나쁜 시력 탓에 원고를 더듬더듬 잘못 읽어 결국 낙방했고, 이후 취직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무작정 명동거리를 헤매다가 우연한 기회로 당시 음악을 하던 큰오빠 친구의 권유로 미8군 가수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오빠 친구의 주선으로 미8군에서 노래를 시작하게 된 패티 김은 다른 여자 가수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168cm의 큰 키와 육감적인 몸매 때문에 첫 무대부터 미군들이 내지르는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가 여기저기서 난리가 났으며 이내 키가 크고 노래 잘하는 가수가 나왔다라는 소문은 미8군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미8군에서는 최고의 스타였던 그녀였지만 아직 집 안에서는 그녀가 가수 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결국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딴 살림을 차렸던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가장이었던 큰 오빠가 그녀에게 “딴따라가 웬 말이냐 집안 망신이다. 당장 그만둬라.”라는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때 그녀가 속으로 우리 집안이 이미 쫄딱 망했는데 뭐가 더 망할 게 있냐?는 생각은 했지만, 당시 실질적인 가장인 큰오빠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집 안에서 5개월간 갇혀 살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무대의 맛과 무엇을 경험한 상태여서 당시 그녀는 노래가 너무 부르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매일 울었더니, 어느 날 그녀의 오빠가 “너 그렇게 노래하고 싶으냐? 그럼 노래해라. 그 대신에 잘해야 한다.”라며 마침내 그녀의 가수 활동을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진출

그렇게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르다가 1959년부터는 김혜자라는 본명 대신 린다 김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다음에 1960년에는 한국 가수 최초로 일본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일본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당시 엔카 가수뿐인 일본에서 그녀가 팝송을 불렀더니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 그녀의 첫사랑이자 쇼단 단장이었던 유부남 베니김이 어느 날 그녀에게 “미국의 여가수 페티 페이지와 같은 명가수가 되어 유명해져라.”라는 권유로 받아서, 이때부터 예명을 린다김에서 패티김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한편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베니김의 쇼단에는 훗날 그녀의 남편인 길옥윤 씨도 이곳에서 연주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길옥윤을 본 패티김의 첫인상은 “목소리며, 태도며 모두 시원시원했다. 한참 선배인 길옥윤이 먼저 인사를 청하기도 했으며 다리를 꼬고 앉아 큰소리로 웃는 모습이 좀 건방져 보여 그다지 탐탁지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미국 진출, 귀국 후 다시 만난 길옥윤

일본에서 활동하던 패티김이 활동이 시들해질 무렵 우연한 기회로 미국 진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동양인의 여자가 미국에서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은 일본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미국 생활 3년 만에 수중에 돈은 떨어지고 마음도 지치고 있을 때, 서울에서는 어머니의 위독함을 알리는 전화가 와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한편 이 무렵 음악을 하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했던 길옥윤 역시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는데, 그렇게 길옥윤과 패티김이 연이어 귀국하자, 방송사들은 두 스타를 함께 묶는 특집 프로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방송사들은 인터뷰할 때도 두 사람을 같이 불렀습니다. 색소폰을 매력적으로 불던 길옥윤이 패티김과 함께 공연할 때가 많아지다 보니,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습니다. 원래 길옥윤은 일본의 동거녀가 있었으나, 당찬 패티김의 모습에 점점 호감을 느껴 그녀에게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1966년 4월이 지나면 다시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출국 날이 다가오자 길옥윤은 애가 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심정을 담은 노래 4월이 가면을 만들어, 어느 날 늦은 밤에 패티 김에게 전화를 걸어 이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렇게 패티김을 한국에 눌러 앉히기 위해 달콤한 사랑 노래를 선물하자, 그녀 역시 마음이 흔들려 결국 출국을 포기하게 되었고 두 사람이 결혼을 결심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기막힌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두 사람은 전방 위문공연 이후 군 책임자와 차를 마시며 담소하다가, 타고 가야 할 첫 번째 버스를 실수로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버스에 올라탔는데 승차가 예정됐던 첫 번째 버스가 갑자기 전복하는 바람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유명을 달리하는 대형 사고가 눈앞에 벌어졌습니다. 천운으로 사고를 모면한 두 사람이 처음으로 운명이라는 걸 느끼고 결혼까지 결심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결혼 생활

이렇게 두 사람이 1966년 12월 10일, 당시 공화당 의장이었던 김종필 주례로 3,000여 명의 하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결혼 후에도 두 사람은 음악적 명콤비로 수많은 주옥같은 곡들이 쏟아져 나와, 노래든 결혼 생활이든 모든 것이 순탄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길옥윤는 결혼 전에도 만취해 살았지만, 결혼 후에도 술자리가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실상 알코올 중독이었으며 그녀의 말에 따르면 “결혼 후 길옥윤이 맑은 정신으로 집에 들어온 날이 거의 없었고, 심지어 포커를 치다가 며칠씩 안 들어올 때도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패티김이 당시를 고백하길 “우리는 음악적으로는 환상의 콤비였지만, 현실 부부로서는 아니었다. 그는 늘 만취해 업혀 들어오곤 했고 여기저기 먹고 마시고 잠자고 해서 심지어 별명이 길삿갓이었다. 그래서 결혼하는 순간부터 그런 후회가 밀려왔으며 사실 그는 결혼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혼

아무튼 이런 와중에도 길옥윤이 연이어 사업마저 실패하자, 1970년 9월에는 두 사람이 끝내 별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길옥윤이 재즈를 배운다며 홀로 미국으로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1973년 대한민국 최초로 이혼 발표 기자회견을 했고, 당시 이혼 발표인데도 사회자까지 있어서 이후 이혼식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이혼하자, 당시 여론은 패티김이 착한 남편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린 나쁜 여자이고, 길옥윤은 불쌍한 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녀가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습니다. 또한 길옥윤을 버리고 외국 남자하고 연애하다가 헤어졌다는 소문까지 나돌자, 패티김은 다시 미국으로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그녀가 비난과 오해 속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어느 날 그녀의 여러 팬이라는 외국인이 접근하게 되는데, 미국에서 무역업을 하는 이탈리아 출신의 동갑내기 남자로 호남형에 유머로서 하고 가장 중요한 패티김이 학을 뗀 술은 아예 입에 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 되었습니다. 그가 “당신이 만약 아이를 낳아주면 아이 몸무게만 한 보석을 선물하겠다.”라며 청혼했고 이때 패티김이 청혼을 받아들여 마침내 두 사람은 1976년 2월 미국 뉴욕에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패티김이 그의 딸 카밀라를 낳자, 두 번째 남편이 청혼할 때 약속했던 대로 7.5kg 사파이어를 선물했고, 그렇게 다시 안정을 찾은 패티김은 대중가수로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서 서는 등 가수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패티김이 보석 받고 재혼할 무렵 당시 일본에 머물며 침체와 우울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던 길옥윤은 다행히도 다시 의욕을 되찾아 신인 발굴에 나서게 되는데, 그때 발굴한 가수가 무명의 혜은이로 1976년 작곡한 당신은 모르실 거야로 혜윤이를 정상에 올려, 그로서는 음악 인생의 제2의 전성기가 펼쳐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두 사람의 콤비는 서울가요제, 10대 가수가요제, 방송가요 대상 등 중요한 상을 모두 휩쓸 만큼 아주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혜은이와 길옥윤의 염문설을 돌았으나 길옥윤이 극구 부인하다가, 1980년에는 24세 연하의 여성과 결혼해서 딸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후 길옥윤은 서울 올림픽 폐회식 음악을 작곡하는 등 음악 활동에만 전념하려 했으나, 또 사업에 뛰어들다 또다시 실패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일본으로 도피까지 해야 했고, 1994년 5월 골수암으로 일본의 집 앞 계단에서 쓰러져 결국 병상에 드러눕고 말았습니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패티김은 길옥윤을 일본에서 초라하게 하늘로 보낼 수 없다라며 여기저기에 도움을 청했고, 그 덕분에 길옥윤이 귀국하자, 패티김은 또다시 “천국 가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 길옥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라며, 1994년 6월 SBS에서 길옥윤 이별 콘서트 특별 생방송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손을 쓰기도 했습니다. 한편 길옥윤이 생을 마감하기 전 병상에서 입버릇처럼 “나의 곡을 가장 잘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패티김”이라고 했습니다.

패티김은 2012년 2월 15일 기자회견에서 “1년간 국내외에서 진행될 고별 공연을 끝으로 가수를 은퇴하겠다.”라고 선언을 한 후 그녀의 공연 역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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