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개그맨 밝혀진 충격 사인 “시신은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 그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가끔 사인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비보가 들리곤 합니다. 풍자 개그로 이름을 날렸던 ‘김형곤’ 역시 이유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떠난 후 전처의 충격적인 행보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대체 김형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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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 활동과 시련

1960년생 김형곤은 1980~90년대에 왕성하게 활동한 코미디언입니다. 1980년 데뷔하자마자 뚱뚱한 몸에 동그란 얼굴 그리고 재치 있는 입담으로 ‘젊음의 행진’ ‘젊은이의 토요일’ 등에서 인기를 끈 김형곤은 서세원, 주병진과 함께 가장 인기 있는 개그맨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는 80년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유머 1번지’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탱자 가라사대’, ‘꽃피는 봄이 오면’ 등의 코너에서 시사 개그를 선보이며 사회적 붐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사회풍자를 했던 만큼 그는 정치권의 압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가 선보인 개그의 절반은 방송에서 잘린 것은 물론, 안기부에 끌려가 얼차려를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김형곤은 일찍부터 성소수자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습니다. ‘음지에 숨어 사는 이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목소리를 냈지만, 그로 인해 부인과 함께 운영하는 술집이 퇴폐업소로 몰리며 영장을 받는 등의 시련을 겪었습니다.

정치권을 풍자하는 김형곤을 눈엣가시로 여긴 정치권의 겁박이었습니다. 평상시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던 김형곤은 제16대 총선이 있었던 2000년 무소속으로 성동구에 출마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낙선이었고, 그는 안 좋은 성적을 받은 슬픔과 함께 이혼의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혼과 남겨진 재산

낙선 직후 정치권에 발을 내딛는 것을 극구 말렸던 부인과 김형곤의 갈등은 점점 더 심해졌고, 결국 두 사람은 이혼했습니다. 이혼 직후 김형곤은 괴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특히 당시 6살이던 아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 때문에 아이를 국내에 두기도 힘든 형편이었습니다. 결국 아이를 6살 때 영국으로 유학 보냈는데, 아들이 보고 싶었던 것은 물론,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한참을 괴로워했습니다.

사실 이혼 후에도 김형곤은 전처와 친구처럼 지내며 아들의 부모 노릇을 톡톡히 했습니다. 영국에 있는 아들 곁에 번갈아가며 가서 머물기도 했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전처 정유진은 “저는 보름정도 있다가 귀국했고, 아들 아빠는 거기서 열흘 남짓 머물렀다. 그리고 이혼한 후에도 시어머니와 자주 만나고 전화 통화도 하면서 지냈다. 이혼을 했지만 전 남편과 친구처럼 지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부부의 연은 끊었지만 아이라는 매개체로 각자의 가족들과도 가깝게 지냈다고 합니다.

이런 점은 김형곤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김형곤을 기리는 코미디 전용 극장을 전처 정유진이 맡은 것만 봐도 그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김형곤의 형은 당시 동생이 한 일에 대해 이렇게 전했습니다. “동생이 대학로에 있는 극장 등의 유산을 남겼는데 비록 아내와 이혼한 상태지만 그래도 아들의 뒷바라지를 해줄 전 부인에게 동생의 유산이 가는 것이 옳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극장 등의 유산을 모두 고인의 전 부인에게 등기해줬어요.” 이혼한 전처에게 유산을 남기기 쉽지 않은데 김형곤은 그만큼 대인의 면모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따뜻한 선배 그리고 군기반장 김형곤

그는 까마득한 어린 후배들에게도 잘해줬습니다. 후배의 양희성이 계속 무명으로 사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군기가 강한 개그계인 만큼 공기를 잡을 땐 또 잡는 선배이기도 했습니다. 김형곤은 군기 반장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1985년에는 최양락이 반말하자, 동료와 함께 찾아가 그를 혼내놓는 사건으로 이목을 끌었습니다.

까마득한 후배들에게는 은혜를 베푸는 선배였지만 가끔은 군기를 위해 과격한 행동을 하는 선배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 김형곤의 은혜를 받았던 조원석, 양희성 등은 김형곤과의 이별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죽음

김형곤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사인으로 2006년 3월 11일 향년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형곤은 당시 사우나에서 땀을 뺀 뒤, 헬스를 하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의 원래 습관은 먼저 운동을 한 후, 사우나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날 따라 김형곤은 운동 습관을 갑작스럽게 바꿨습니다. 그 후 화장실에서 앞으로 고꾸라지며 문에 이마가 함몰될 정도로 크게 다쳤습니다.

쓰러진 상태에서 약 1시간 정도 지난 후에야 사람들에게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발견된 후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결국 다시는 의식을 찾지 못하고 향년 4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사람들은 그의 사인을 ‘심장마비’라고 추측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여기에 반박 의견을 냈습니다. “김형곤은 심장마비가 아니라, 뇌출혈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특히, 김형곤은 마지막 몇 개월 전에 건강검진을 받았을 때 이상이 없었고, 또 평소에도 헬스 등으로 철저하게 건강을 관리했다. 콜레스테롤, 혈압, 당뇨 등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김형곤은 당시 건강한 상태였다.”라고 합니다.

당시 그를 검안했던 병원은 심근경색이나 부정맥에 의한 급성 심장마비의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습니다. 경찰 측에서는 구급대에 의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떠난 상태였고, 타인에 의한 혐의를 찾을 수 없기에 돌연사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이후 부검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형곤의 사인은 영원히 미제로 남았습니다. 일각에서는 생전 그의 행동을 되짚어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김형곤은 데뷔 초부터 ‘공포의 삼겹살’이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비대한 몸을 가졌습니다. 몸무게가 120kg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고도 비만으로 당뇨 등 몸에 이상을 느끼던 그는 굳은 마음으로 다이어트를 결심했습니다. 금연, 금주는 물론이고, 생식을 하는 등 식단 관리에도 힘썼으며 거기다 매일 헬스클럽에서 2시간씩 운동을 하며 독하게 살을 뺐습니다.

심할 때는 한 달 만에 13kg을 감량할 정도였습니다. ‘무리한 운동을 했던 것들이 쌓여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느냐?‘는 추측도 있었습니다. 개그맨 이용식은 “형곤이는 평소 다이어트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사인은 무리한 운동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라며 말을 보탰습니다. 엄용수는” 화장실에서 오래 있는 김현곤의 습관이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한 것 같다.”라며 비통함을 내비쳤습니다.

그의 마지막 선행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개그맨 김형곤은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며 남겨진 이들을 슬프게 했습니다. 사후 그의 몸은 고인의 뜻에 따라 가톨릭 대학교 의과 대학 병원에 기증됐습니다. 기증서류에 사인한 전처 정유진은 “‘오래 전에 죽으면 몸을 기증하자. 땅에 묻혀 썩어 없어질 육체인데 후세를 위해 학도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뜻을 받들었다.”라고 밝혔습니다. 생전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안겨줬던 김형곤이 떠나가면서도 후세를 위한 선행을 해 감동을 안겼습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비보에 방송계는 큰 슬픔에 휩싸였습니다. 그가 떠난 지 세월은 지났지만, 많은 이들의 그가 남긴 발자취로 김형곤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지금 있는 그곳에서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라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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